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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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3돌 특별기획] 사라지고 훼손되고…'열사들의 혼'은 관리받지 못했다

목숨까지 바쳤던 열사들의 혼… 윤봉길 의거지 등 中·美·日 산재 / 국외에 있어 관리·유해 봉환 한계 / 흔적 사라지고 개발 등에 훼손도
윤봉길 의사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편히 잠들 수 없었다.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의 훙커우 의거 후 일제는 그를 공개처형하려다 “독립운동가들을 자극하고 국제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계획을 바꿨다. 일본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로 윤 의사를 옮겼다. 사형은 그해 12월 19일 육군사격장에서 집행됐다. 일제의 무도함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6년 3월 6일 김구가 가나자와에 파견한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유해를 찾을 때까지 공동묘지 전체를 파헤치겠다고 일본 정부를 압박한 끝에야 암장지(暗葬地·몰래 묻은 곳)를 찾아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쓰레기 처리장 부근이었다. 일본은 관리소를 설치해 한국인의 접근을 감시하고 발굴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가나자와시에 있는 ‘윤봉길 암장지적비’는 일제가 1932년 12월 윤봉길 의사를 처형한 뒤 시신을 몰래 묻은 곳에 세워져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윤봉길의 의거는 의연했으나 슬픈 죽음을 증언하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가 중국과 일본에 산재해 있다. 상하이에 ‘윤봉길의사 홍구공원 의거지·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 신문지 터’가 비사를 전한다. 오사카에는 ‘윤봉길 구금소 터’가, 가나자와에는 ‘순국지’, ‘암장지적비’와 ‘순국기념비’ 등이 있다.

나라를 잃어 해외를 떠돌면서도 한 치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투사들, 끝내는 목숨까지 던지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열사들의 혼이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곳곳에 서려 있다.

미국 워싱턴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지난 5월 130여년 만에 재개관하며 감격을 맛보았으나 대한제국의 재외공관에는 망국의 슬픔이 짙다.

주영공사를 지낸 이한응은 일제의 강요로 공사관이 문을 닫게 되자 1905년 공사관 건물에서 자결했다. 주러공사 이범진은 1911년 1월 “구적(仇敵·원수)에 대해 보복할 수 없고 또 책벌을 가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이라고 한탄하며 목숨을 끊었다. 대만 타이베이시에는 1928년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를 처단하려다 체포된 조명하 의사의 순국지가 있다. 타이베이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사형 집행 때까지 의연한 자세로 수형생활을 해 교도관들을 감동시켰다고 전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타국에 뼈를 묻은 그들을 기려 사적지를 관리하고, 유해를 봉환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우이겠으나 해외에 소재한다는 점 때문에 한계가 많다. 독립기념관이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조사한 뒤 소개한 글에는 “현재 어떠한 표식도 없다”, “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등 사적지 관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 적지 않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사적지가 소재한 국가의 정부, 사적지 소유주와의 협의 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유해 봉환은 묘소 확인이 어렵고, 그나마 확인된 곳 중에는 해당 지역의 개발 등으로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중국 충칭의 ‘화상산 한인묘지’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많이 묻힌 곳이지만 “인근에 담배공장창고와 쓰레기 처리장이 있어 폐기물이 흘러내리고, 토사가 많이 깎여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946∼2017년 134위의 유해가 봉환됐으며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에 약 140기의 독립유공자 묘소가 존재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