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공방에서 작업 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산시 제6호 무형문화재 벼루장인 유길훈(69)씨가 벼루를 만드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방사보(文房四寶·문인의 방에 필요한 네가지 보물)의 으뜸으로 선비들이 귀히 여겼던 벼루. 그러나 지금은 공예품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루를 만들며 장인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유씨를 5일 만났다.
“난생처음 제 손으로 벼루를 완성한 순간의 그 희열과 성취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52년째 벼루장이로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벼루장 유길훈씨가 5일 공방에서 자신이 만든 벼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유씨의 ‘언양록석 벼루공방’은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의 ‘반구대 안길’에 있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는 올해로 17년이 됐다.
그는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충북 진천 상산벼루 제작의 대가인 고 김인수 선생의 문하에 입문해 청주 두타산 자락에서 벼루를 만들었다. 벼루의 재료인 자석(붉은 돌)이 두타산에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는 1993년부터 더 나은 벼룻돌을 찾아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한중수교 이후 벼루의 명품이라는 중국의 ‘단계연’이 국내에 많이 들어오면서 벼루장인들이 사라져갔다.
그러다 2001년 3월쯤 반구대 일대 지질조사를 했던 지인에게서 “찾는 돌이 언양 반구대에 있는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6개월 정도 대곡천을 따라 천전리까지 정밀탐석을 했다. 대곡천 강바닥에 있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돌을 발견, 벼루로 만들었다.
“제가 찾던 돌이었어요. 돌의 색이나 강도는 단계연과 비슷했고, 보령 벼루 중 최상으로 치는 백운상석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상질이었습니다.”
좋은 벼루는 돌의 입자가 고와 먹물이 탁하지 않고 갈아놓은 먹물은 돌에 스며들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써 놓은 글씨에서는 윤기가 난다. 언양벼룻돌이 그랬다.
그는 언양에 정착하게 된 것이 ‘벼루장이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정착한 후 그는 대곡천변에서 금석문을 발견했다. ‘조선 효종 6년에 연로(硯路)를 넓히는 공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집청정에서 그의 공방으로 가는 길, 바로 그 길이었다. 벼루길, 벼리길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벼루 연’자를 사용한 것이다.
벼루장 유길훈씨가 돌을 갈아 벼루를 만들고 있다. 사진작가 허남호 제공 |
그는 벼루를 만드는 기술은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윗대부터 전해져 오던 기술을 스승이 배웠고, 또 자신에게 전승되면서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 역시 후대에 이 기술을 물려줘야 합니다.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 전승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청주에 제자를 두고 있지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언양에서도 기술을 이어주려 했다. 제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자 그의 아들(40)이 이어받겠다고 나섰다. 고민 끝에 지난 6월부터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언양벼루의 역사는 이어지겠지요. 전통문화의 한 일원이라는 자부심으로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벼루를 만들겠습니다.”
공방에 앉아 다시 돌을 갈아 벼루를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집념을 볼 수 있었다.
울산=글·사진 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