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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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예산심의권 강화해 정부와 힘의 균형 맞춰야”[차 한잔 나누며]

‘30년 입법부 근무’ 정재룡 국회 교육위 수석전문위원
“처음 국회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입법부의 위상이 높아지긴 했다. 하지만 예산심의권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금은 반쪽짜리 심의권으로 감액을 조금 할 수 있는 정도다. 개헌이나 헌법 재해석을 통해 국회 예산심의권이 좀 더 강화돼야 한다.”

19일 여의도 국회 본청 사무실에서 만난 정재룡(58) 국회 교육위원회 수석전문위원에게 입법부가 더 보완해야 할 역할을 한 가지 꼽아달라고 했다. 몇 초 고민하던 정 전문위원은 ‘예산심의권’을 말했다. 국회는 행정부가 가져온 예산안을 감액할 수는 있지만 증액하진 못한다. 그는 “정부에 대해 견제와 균형을 맞추려면 국회가 자율적인 예산심의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입법의 현장’이란 책을 펴냈다. 1988년 입법고시 9회로 국회사무처에 들어온 그는 30년째 봉직 중이다. 그는 각종 토론회에서 주제 발표한 내용과 입법 과정에서 찾아낸 국회 운영의 개선 방향 등을 책에 서술했다.

정재룡 국회 교육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이 19일 국회 사무실에서 최근 발간한 ‘입법의 현장’에 담은 국회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이 책의 백미는 부록으로 담긴 ‘실무 참고자료’다. 여기에는 법안 검토보고서 작성법, 예산안과 결산 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등이 기록됐다. 그가 30년간 국회에서 익힌 실무 내용을 진액만 녹여 담은 것이다. 그는 “일부 의원 중에서도 처음 당선된 다음에 입법 실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각 의원들이 입법 실무를 잘 알지 못하면 회의장에서 상임위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나 의원실 직원들 써주는 질의서에 의존하게 되는게 현실이다. 이 책이 도움됐으면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정 전문위원은 입법부 업무가 중요성에 비해 행정부보다 부각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30년간 근무해 보니 입법 실무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데 입법 실무는 ‘고급업무’”라고 정의했다. 고급업무라고 표현한 까닭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이 늘어나면서 정책 주도권이 일정 부분 입법부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국회 들어왔을 때 의원 발의 법은 몇백 건밖에 안 됐는데 19대 국회 때 4년간 약 1만8000건 발의됐고, 20대 국회에서는 약 2만건이 발의될 것으로 예측된다”며 “과거에는 ‘골격입법’이라고 해서 기본 틀만 법에 담고 나머지는 대통령령이나 각 부령으로 위임한 반면 요즘에는 하위법령에 있던 것까지 법으로 규정하는 추세여서 국회가 정책을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 상임위 전문위원이나 입법조사관은 일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필요할 때는 소신껏 할 말을 한다. 그의 소신이 실제 정책 방향을 바꾼 사례도 있다. 2015년 10월 28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는 국립대 총장 선출제도와 교육부 대학재정지원사업 연계를 놓고 여야 공방이 오갔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연계를 찬성한 반면 야당이 반대해 합의점을 찾기 위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정 전문위원이 과감히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당시 회의에서 “단순히 총장 직선제를 채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업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현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말 용감했던 것 같다. 교육부 공무원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며 “수석전문위원이 존재감이 없는 줄 알고 교육부 공무원들이 거들떠도 안 봤는데 그날엔 회의 끝나고 다들 찾아와서 일일이 인사를 하고 갔다. 어렵게 검토보고를 마쳤고 실제 그해 12월 총장임용제도 개선 방안은 제가 제시한 대로 교육부에서 발표했다”고 웃어보였다.

입법부에서 근무하다 보면 행정부와 신경전을 벌일 때도 있다. 자존심 세고 콧대 높은 상대를 만날수록 그는 철저히 업무로 승부를 겨룬다고 했다. 그는 “2013년 법사위에서 근무할 때 법원행정처를 상대하기 까다로웠다”며 “콧대 높게 나오기에 검토보고서를 정말 꼼꼼히 작성해 들이밀었더니 태도가 달라졌다. 무시 안 당하려면 맡은 일을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후배 공무원들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영혼’을 꼽았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인데 영혼과 책임감 없이 근무하는 후배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후배들이 승진했다고 인사 오면 이런 말을 한다. ‘승진의 기쁨은 그때뿐이다. 공직 생활에서 의미와 기쁨, 보람은 일에서 찾아야 한다”며 “승진에 연연하지 말고 편한 곳만 찾기보다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