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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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부성애와 교사의 양심

“선생님, 이번 수행평가는 어떻게 냈어요? 지난번에는 지문이랑 어휘 난도가 꽤 높았잖아요.”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중인 친구 A는 최근 야간 보충수업을 마치고 동료 교사 B의 질문을 받았다. 같은 과목을 가르치지만 A와 B는 학년이 달라 함께 상의하면서 시험문제를 내지 않는다. 늦은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출제범위나 질문지 수준을 조금 조정했어요.” A는 선배 교사인 B가 후배인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질문으로 생각해 수행평가 출제 목적과 범위 등을 설명했다. 
이창훈 사회 2부 기자

퇴근 후 집에 들어온 A는 불현듯 한 학생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속으로 아차 싶었다. B의 자녀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B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A는 특정 학생에게만 수행평가 시험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준 셈이었다. A는 곧장 자신이 B에게 했던 말을 정리했다. 다음날 해당 내용을 학년 전 교실에 전달한 A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소한 정보라도 모든 학생이 공유하는 것과 한 학생만이 알고 있는 것은 시험의 공정성을 훼손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는 둘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만약 A가 B의 자녀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겠다고 판단해 B에게 말한 내용을 다른 학생들에게 전파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덮어졌을 사안이다. A를 행동하게 한 것은 교사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이었다.

“우리 교육학 배울 때 처음에 교직관 배울 때 나오는 거 기억나니? 교사로서의 소명의식. 현장에서 보면 시험출제와 문제 관리에 생각보다 허술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공정성을 지키려는 노력과 교사의 양심이 제도의 구멍을 메워왔다고 생각해.”

의외였다. 대학 시절 교육학 수업 제일 뒷자리에 앉아 수업 중 함께 몰래 도망가던 친구 A가 어느새 교육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직관을 말하고 있었다. 교사라는 직업의 안정성과 사회적 지위 때문에 교사가 됐다고 솔직하게 말하던 A가 어떻게 달라진 걸까. A에게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을 길러준 것은 교육현장에서 체험한 교단의 무게와 가치였다.

12일 경찰이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발표한 시험지 유출 정황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1년 반 동안 쌍둥이 딸이 치른 6번의 시험 중 5번의 시험문제가 모두 유출됐다. 현모 전 교무부장은 쌍둥이 딸을 위해 시험지 답을 메모장에 옮겨적고 사전에 시험지까지 집으로 빼돌렸다. 교단에서 정직과 양심을 가르쳐야 할 교사가 정작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부정과 편법을 몸소 실천했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법원에 출석한 현씨가 “딸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억울해했다. 당연하다. 그의 딸들이 공부한 공부는 진리탐구와 양심 수양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권모술수였기 때문이다. 남보다 앞서 조기교육을 한 것일 뿐이니까.

“더는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험지 유출 의혹으로 뒤숭숭한 교육계에서 묵묵히 교단을 지키는 교사들이 법정에 설 현씨에게 하고픈 말이 아닐까.

이창훈 사회 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