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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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헤게모니 쟁탈전

수출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제조업체들이 앞다퉈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던 1985년 미국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을 불러모아 ‘플라자 합의’에 도장을 찍게 했다. 3년 만에 일본 엔화 가치가 50% 뛰어올랐다. 일본은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MGM, 페블비치 골프장 등을 사들이며 엔화의 기축통화 등극을 꿈꿨다. 하지만 엔화 초강세는 부동산과 증시 거품으로 이어졌다. 일본 기업들은 환손실을 피하기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다. 일본 내 제조업이 공동화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자산 버블이 붕괴되면서 장기불황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이번에는 중국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개월 만인 지난해 2월 “중국은 환율조작 그랜드 챔피언”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무역전쟁을 선포했다. 추이텐카이 주미 중국대사는 “중국판 플라자 합의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무역전쟁을 벌이던 G2(주요 2개국)가 세 규합에 본격 나서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포럼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시 주석은 “한 나라가 어떤 발전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는 그 나라 국민의 선택”이라고 했다. 일대일로 사업에 미국이 훼방놓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자 펜스는 “미국이 더 나은 선택권을 제공한다”고 역공했다. 미국에 붙으라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친미였다가 친중으로 돌아선 국가들을 분류하고 있다.

민간 CIA(중앙정보국)로 불리는 미국 스트랫포는 미·중 갈등을 헤게모니 전쟁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고금리 정책을 무기로 꺼내들었다. 고금리는 신흥국 경기침체로 직결될 수 있다. 달러빚을 못 갚으면 망하기도 한다. 이 고래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트럼프는 한국을 ‘안보 무임승차국’이라며 비난하고, 중국은 한국이 대중 경제의존도가 높은 것을 약점 잡아 흔든다. 새우등 터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덮치지 않을지 걱정해야 할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용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