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지음/창비/3만원 |
“대한민국 최초의 판·검사와 변호사, 그들을 알아야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이른바 한국 법조의 뿌리를 알아야 지금의 ‘사법농단’사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불가침의 성역 한국 판·검사와 변호사들의 세계를 폭로한 전작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유명해진 저자 김 교수가 또 걸작을 냈다. 해방 직후부터 활동한 초기 법조계 인사 3000여명의 뿌리와 성향을 분석해낸 책이다. 김 교수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까지 활동한 이들을 몇 부류로 구분했다.
1그룹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인사들로, 박정희정부까지 법조계를 주물렀다. 2그룹은 1922년부터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인사들이다. 3그룹은 일제강점기 서기 겸 통역관으로 일하다 판·검사에 임용된 이들이다. 4그룹은 해방된 다음 각종 시험에 합격해 법조계에 입문한 법률가들이다.
김 교수는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봤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사람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며 “누구도 이러한 역사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풀이했다.
‘법정’ 1950년 5월호에 실린 제2차 법조프락치 사건의 판결문이다. 법조내부에 이른바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검사들이 구속, 퇴출된 사건이다. |
4그룹은 법조계 최대 스캔들로 평가되는 ‘이법회’(以法會, 혹은 의법회) 출신들이다. 이법회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45년 8월 14일 조선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가 일제 감독관이 사라지자 응시자들 중 106명이 합격증을 받았다. 그 전말은 이렇다. 나흘간의 시험 이틀째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방송이 울리자 일본인 시험관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응시자들은 궁지에 몰린 일본인 시험위원들을 겁박해 합격증을 받아냈던 것. 응시사실만 있으면 모두 합격을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이법회’ 멤버들은 해방 후 각종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초창기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인력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법회 멤버들은 그 경력을 감추는 바람에 지금도 전체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직이다.
김두식 교수는 최근 발간한 ‘법률가들’을 통해 “최고 엘리트라는 법조인들이 지금과 같은 권력을 누릴 자격을 갖추었나, 그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인가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
김 교수는 “오늘날 법률가들은 어려운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해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고 보지만, 실상은 그 뿌리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면서 “해방 정국에서는 시험에 붙지 않고도 법률가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전두환 대법원장’이었던 유태흥은 공식기록으로 2회 변호사시험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법회 출신이다. 그러나 홍남순의 경우 같은 경로를 거쳤다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김 교수는 “행정부와 입법부는 ‘선출된 권력’인 반면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어서 그 정당성이 늘 문제된다”면서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법조계 엘리트가 되려면 반성은 하지 말고 자기 이익만 취해야 한다고 느낄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교수는 사법농단에 대해 “법원과 검찰 사무실에 돈이 돌던 1990년대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다”면서 “향후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에 적힌 대로 법관 개개인이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