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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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범죄'…글로벌 인신매매 여전히 기승 [세계는 지금]

여성·아동 납치 주요 타깃… 性·노동력 착취 '현대판 노예' / 범죄조직의 보복 두려워 신고 꺼려 / 2016년 기준 피해자 4년새 400만명↑ / 작년 인신매매 관련 기소 1만7880건 / 남성 강제노동·여성 성매매 시달려 /피해자들 ‘트라우마’ 오랜 기간 지속 / 사회적응도 쉽지 않아 예방 가장 중요 / 수사기관들 금융거래 역추적해 수사도 / 최근 영국서 예방 시스템 개설돼 주목
#1. 나이지리아에 살고 있던 페이스(여)는 이탈리아의 나이지리아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직업 소개 대행업체의 제안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유럽에서 돌아온 그의 친구들이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그의 부푼 꿈은 곧 악몽으로 변했다. 직업을 알선해준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돌변해 5만달러(약 5600만원)의 소개·체류비를 갚으라고 요구하면서 만약 성매매를 통해 돈을 갚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페이스는 수차례 협박을 당하며 여러 번 칼에 찔리기도 했다. 가까스로 도망친 그는 이탈리아에서 인신매매 조직에 걸려들어 성적 착취를 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활동에 나서고 있다.

#2. 방글라데시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아슈이크는 런던에서 요리사를 구한다는 구직 광고를 보고 돈을 벌어보자는 마음에 영국행을 결심했다. 광고를 낸 사람은 비자 발급 비용 2만달러(약 2200만원)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아슈이크는 급히 돈을 빌려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직업을 알선해준다고 한 사람은 말을 바꿔 그를 스코틀랜드의 한 호텔로 보냈고 아슈이크의 여권을 강제로 압수했다.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으면 ‘불법 노동자’로 당국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에 아슈이크는 수십 개의 호텔 방을 혼자 청소하고 찬 바닥에서 자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한 푼도 벌지 못한 채 수년간 강제노동에 내몰린 뒤 호텔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는 2만달러를 갚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전 세계 인신매매 범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신변 보호를 위해 실명, 사건 발생 날짜를 가린 채 미 국무부가 지난 6월 발간한 ‘인신매매 보고서’를 통해 공개한 사례들은 인신매매 범죄가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에는 인신매매를 통한 강제노동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분쟁 지역 및 난민 증가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들이 많아지면서 인신매매를 둘러싼 범죄 규모가 나날이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신매매 범죄는 피해자에게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주는 동시에 지역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범죄인 만큼 전문가들은 금융 거래 감독을 통한 범죄 예방 및 피해자 지원 대책이 국제 사회의 공조 속에 정비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신매매 현황

인신매매는 2003년부터 발효돼 173개국이 인준한 팔레르모 조약을 통해 ‘강박, 납치, 사기, 권력남용, 취약한 지위의 이용 등을 통해 착취하는 모든 행위로, 여기서 착취는 다른 사람의 성을 판매하거나 다른 종류의 성적 착취, 강제노동, 노예 강요와 노예 강요에 준하는 행위, 장기 적출 등을 포함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런 규정에도 현재 인신매매 피해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한 규모를 산출하는 건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범죄’라고 불릴 정도로 피해자들이 범죄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해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국제노동기구(ILO)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2016년 기준 2490만여명이 강제노동 혹은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추정됐다. 이 중 64%(1600만여명)는 가사나 건설, 농사 등 사적 분야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410만여명(17%)은 정부 기관에 의해 강제 노동에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이들은 480만여명(19%)에 달했다. 장기매매를 위한 인신매매 규모에 대해서는 최신 자료가 없지만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장기이식의 5~10%가 불법적으로 적출된 장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납치돼 성적 착취를 받다 탈출한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여성들이 새해를 기념하며 불을 켜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뉴요커 캡처

인신매매 규모는 증가 추세다. ILO와 미 국무부에 따르면 인신매매 피해자는 2012년 대비 2016년 400만여명 증가했고, 인신매매와 관련한 기소 건수는 같은 기간 전 세계적으로 7909건에서 지난해에는 1만7880건으로 늘었다. 이를 두고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는 “인신매매는 예전에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범죄로 치부됐다”면서도 “하지만 현재 인신매매는 여러 국제 범죄 중 두드러질 정도로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신매매 피해는 주로 여성·아동에게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마약범죄국(UNODC)이 2016년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인신매매 범죄 피해자의 71%는 여성이고 28%는 18세 미만 아동인 것으로 조사됐다. 성인 여성 피해자의 72%는 강제 성매매 등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었고, 성인 남성은 주로 강제 노동(85.7%)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인신매매 증가 배경

이처럼 인신매매가 증가하고 있는 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에 따르면 인신매매로 생기는 수익은 2011년 320억달러(약 35조9000억원)에서 2014년 1502억달러(약 168조5000억원)로 3년 만에 5배가량 증가하는 등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전체 수익의 출처를 분석해보면 990억달러(약 111조700억원)는 피해자를 성적으로 착취해 발생했고, 512억달러(약 57조4400억원)는 강제노동에 따른 수익이었다. ILO는 “성적 착취를 통해 인신매매 조직은 (피해자) 1인당 연간 2만1800만달러(약 2445만원)를 벌었고, 장기매매에 따른 수익은 전체적으로 120억달러(약 13조4600억원)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아동 납치도 인신매매 조직의 주요 수입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800만여명의 아이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중 80% 정도는 부모가 있는데도 시설에 수용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고아원과 연계된 인신매매 조직이 교육을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가난한 가정에 접근해 아이들을 빼돌리는데 이들은 고아원에 아이들이 많을수록 해외 원조 금액이 증가하는 점을 노리고 인신매매에 나서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아프리카 정세 불안 등에 따라 증가하고 있는 난민도 인신매매 조직의 목표가 되고 있다. CNN방송은 지난해 리비아 노예시장을 취재해 20대 나이지리아 남성 2명이 90만원에 거래되는 현장을 고발하기도 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기 전 모이는 대표적인 국가로, 밀수꾼들은 불안한 처지에 있는 난민들에게 돈을 빌려줘 빚을 지게 한 뒤 인신매매를 벌이고 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는 각종 테러단체가 가난, 언어 장벽 등 이중고를 안고 있는 난민 중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힘든 여성이나 아동을 주로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은 아동을 납치해 구걸시키고, 수천명의 여성 및 소녀에게 가사 노예, 강제 결혼 등을 강요하고 있다. 또 소말리아 극단주의 무장단체 알샤바브 역시 가난을 피해 고향을 떠나려는 여성 난민들을 외국에 팔아넘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난민들이 리비아의 한 임시 수용시설에서 심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외신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려는 이들이 모이는 리비아에서 인신매매 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예방 및 피해자 구제 방안

인신매매 범죄는 피해자가 다시 사회에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정신적 상처(트라우마)가 오랜 기간 지속하는 만큼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먼저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단서를 찾기 어렵고 인신매매가 국제적으로 이뤄져 추적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특성을 감안해 현재 각국 수사기관은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를 감독해 인신매매 조직을 발각 또는 기소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태국 정부는 인신매매 범죄에 가담한 고위 공무원의 수상한 거래 내역을 추적해 단죄했고, 미 재무부는 올해 1월 라오스에 본부를 두고 아동 성매매를 자행하고 있는 범죄 조직 ‘자오 웨이’에 대한 제재에 착수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에는 머신 러닝 기법으로 인신매매를 예방하는 시스템인 ‘트래픽 분석 허브’가 개설돼 주목받고 있다. 영국 바클레이 은행, 유로폴, 런던대, 인권단체 ‘스톱 더 트래픽’ 등이 참여하는 이 시스템은 인신매매 조직의 자금 거래 내역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범죄 예방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미 경제지 포천은 전했다.

이와 함께 각 지역 특성에 맞게 피해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선진 사례로 꼽히는 국가는 조지아다. 조지아는 인신매매 범죄 조직이 집이 없는 아이들을 납치해 강제로 구걸을 시킨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지역 사정에 밝은 비정부기구(NGO) 단체 두 곳에 2만달러(약 2200만원)를 지원했다. 이 지원을 받은 NGO는 105명의 아이의 신상을 파악한 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이주민 출신 아이들이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후 조지아 정부는 이 단체의 조언을 받아들여 길거리 아이들이 자주 모이는 바투미 지역에 아이들을 수용하고 교육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범죄 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했다. 정부가 특정 인신매매 사건을 처벌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방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