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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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한국 힙합, 다시 ‘발톱’ 세워라

음악 전문 칼럼니스트는 아니지만 한국 힙합을 오랜 기간 들어온 팬으로서 작심하고 발언한다. “한국 힙합, 그동안 많이 약했다!”

최근 민감한 사회 이슈를 다룬 곡들이 연일 화제다. ‘일부’에서 불붙은 남녀 혐오 현상을 겨냥해 래퍼 산이는 페미니스트, 6.9㎝, 웅앵웅 등 3부작을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했다. 그런가 하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래퍼 도끼 역시 날을 세웠다. 그는 모친의 20년 전 채무로 ‘빚투’ 논란이 일자, 약 1000만원의 빚을 두고 “내 한 달 밥값과 비슷하다”며 고의성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된서리만 맞았다. 이에 말조심이란 곡을 발표해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우리 엄마 뒤를 지킨 것뿐’이라며 정면 대응했다.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
오해는 마시라. 광범위 해악을 끼치는 ‘일부 집단’ 말고는 어떤 입장도 존중하니. 서슬 퍼런 ‘부비 트랩’에 과감히 해체 작업을 시도하는 래퍼들이 반가운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랑 타령, 돈 자랑 일색의 주제에서 벗어나 미움 받을 용기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간 말랑말랑한 노래들이 음원 순위 차트를 점령했고, 힙합 문화도 시류를 좇았다. 물론 강남 스타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싸이의 경우처럼 독특한 콘셉트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음악에서 볼 수 있었던 문란한 청춘 성생활이나 경직된 사회 풍조를 비트는 메시지가 드물어져 아쉬움이 남는다.

힙합이 생소했던 시절에는 파급력이 오히려 더 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은 가출한 수많은 영혼들을 귀가시켰고, 교실 이데아는 주입식 교육에 한 방 어퍼컷을 먹였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DJ DOC는 ‘삐걱삐걱’이란 곡에서 탁상공론만 일삼는 정치인보다 ‘강아지’가 낫다고 했다. 인기 가수라는 사회적 지위와 랩 가사 특유의 날카로움을 적절히 활용한 예다. 외국의 경우는 더욱 살벌하다. 톱스타 에미넴은 모시(Mosh)라는 노래에서 당시 조지 워커 부시 미국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체가 대량살상무기(WMD)”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국민적 반대에도 이라크전을 밀어붙인 부시 대통령은 아연실색했다.

이처럼 흥행 공식을 부순 노래들은 사회에 긍정적인 기제로 작용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현상을 멋대로 호도하는 대신 직시하게 한다. 건전한 공론의 장을 깔아주는 셈이다. 유일하게 ‘내 할 말을 대신 해주는’ 매개체인 힙합이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한다면 사회 토론은 자연히 음지화될 수밖에 없다. 구심점이 없는 개인들이 뭉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끼리 쏟아낸 집단지성은 비뚤어지기 십상이다. 사회를 좀먹는 집단들이 더 불어나기 전에 힙합이 예전의 ‘발톱’을 다시 세웠으면 하는 이유다.

래퍼 산이는 ‘페미니즘 3부작’에 이어 기레기레기라는 곡으로 황색 저널리즘을 신랄하게 깠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중의 구미를 당기는 가십거리 생산 위주로 흐르는 게 언론의 슬픈 현실이다. 경각심을 일깨워줘 고맙다. 불과 며칠 전 한 취재원에게 “제목 장사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 유구무언이다. 기회가 된다면 해당 주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다퉈 보는 건 어떨까. 참고로 기자의 주량은 소주 2병 반이다.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