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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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저무는 ‘父姓주의’ 신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는 김길상과 결혼해 두 아들 최환국, 최윤국을 낳는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가부장제가 엄격했던 일제강점기에 자녀한테 아버지 대신 어머니 성을 물려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요즘의 가족관계기록부에 해당하는 서류의 ‘위조’가 답이다. 서희가 자기 이름은 ‘김서희’, 남편은 ‘최길상’으로 각각 바꿔 기재한 것이다. ‘최 참판 댁 무남독녀’로서 어떻게든 대를 이어야 했던 서희의 고육지책이다. 자녀를 최씨 성으로 만들고자 정작 본인은 김씨로 산 그녀는 “두 아이는 여하튼 최 참판 댁의 핏줄”이라고 자위했다.

자녀가 아버지 성을 물려받는 ‘부성(父姓)주의’는 가부장제를 떠받들어 온 두 기둥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호주’가 되어 가족을 이끄는 호주제였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된 뒤에도 부성주의는 살아남아 여전히 건재하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최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내놓은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에 이 부성주의 원칙을 폐기하는 방안이 들어갔다. 위원회는 “저출산을 부추기는 불합리한 법제 개선의 일환”이라며 “자녀 성 결정을 아버지 성을 우선하는 부성주의 원칙에서 부모 간 협의 원칙으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 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민법 781조 1항)

이처럼 현행법은 부성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되 부부가 합의하면 모성주의를 적용할 길도 살짝 열어놨다. 원래는 무조건 아버지 성만 따르도록 했던 것을 2005년 민법 개정 때 지금처럼 고쳤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건만 기자는 주변에서 “우리 부부는 협의 끝에 자녀한테 아내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고 말하는 남성을 본 기억이 없다. 여성들은 해당 법률 조항 자체가 생소하다는 반응이다. 그러면서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드러낸다. “아무리 부부가 합의해도 시댁 어른들이 완강히 반대하면 실행이 불가능할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관행이 아직 뿌리 깊다는 증거다.

저출산위 로드맵대로 부성주의 원칙을 없애면 문제의 민법 조항은 ‘자의 성과 본은 부모가 협의해 정한다’ 정도의 문구로 바뀔 것이다. 한동안은 별 변화가 없겠으나 차츰 “우리 애는 엄마 성을 따랐어요”라고 당당히 밝히는 부부가 늘지 않을까.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녀는 장차 자녀 성을 뭘로 할지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리라.

‘그래서 부성주의 폐지가 과연 저출산 극복에 도움이 될까.’ 이런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 것이다. 2005년 “부성주의는 남녀평등에 어긋나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에서 권성 재판관이 낸 합헌 취지 소수의견의 한 구절이다. “자녀가 아버지 성을 따르는 건 아버지와의 혈통관계를 대외적으로 공시하고 부와 자녀 간 일체감과 유대감을 강화한다.”

이 문장을 살짝 바꾸면 답이 보인다. “자녀가 ‘어머니’ 성을 따르는 건 ‘어머니’와의 혈통관계를 대외적으로 공시하고 ‘모’와 자녀 간 일체감과 유대감을 강화한다.” 일체감, 유대감 등이 꼭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잖은가.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