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이웃 배려 일깨운 메모 한 장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정말 밤에 힘들어요.”

한 달 전쯤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이런 내용의 메모가 붙었다. A4 용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쓴 메모에는 최근 밤 11~1시에 주기적으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 자신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민감한 체질인데 그 소리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호소 등이 구구절절 써 있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지라 이 메모에 일순 공감이 갔다. 밤에 비슷한 소리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시 아파트 거주자 중 누군가가 운동 따위의 소리나는 활동을 밤에 정기적으로 했을 것이다. 메모의 필자처럼 민감하지 않아 수면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꽤나 거슬리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아. 나만 이 소리가 거슬리는 게 아니었구나. 더 힘든 사람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서필웅 문화체육부 기자
그런데 이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메모의 공백에 “나 역시 힘들다”는 공감의 ‘댓글’이 몇 개나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쓰신 분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의 별도 메모도 붙어 있었다. 심지어, 그 ‘댓글’들 중에는 “소음 나는 집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도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이 순식간에 층간소음에 대한 토론장으로 변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이나 카페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라인 토론전이 엘리베이터 벽에서 재현됐다고나 할까.

이런 호소가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문제의 소리가 이후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효과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문제의 쿵쿵거리는 소리 외에도 아파트가 놀랍도록 조용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토론을 함께 한 사람들, 그 토론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 자연스럽게 소리내는 행동을 조금 더 삼가게 됐을 것이다. 당장 나부터도 그 이후 늦은 밤에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걷고, 시끄러운 행위는 피하도록 좀 더 배려한다.

사실 이런 배려는 아파트 게시판에 ‘아파트 생활의 에티켓’이라는 제목의 공지사항으로 오래전부터 붙어 있었던 내용들이다. 다만 공지사항을 볼 때는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주거 형태 속에서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배려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토론을 거친 지금은 다르다. 비록 메모지를 통한 간접적 대화이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함께 의견을 나누고, 이 과정에서 이웃의 ‘존재’를 인식했다. 일단 이웃의 존재가 마음에 와닿은 만큼 조금 불편하더라도 저절로 배려를 하게 된다. 그리고 덕분에 삶의 질이 조금 높아졌다.

사회를 각박하게 하는 단절된 주거환경을 한탄하는 목소리는 많이 들을 수 있다. 층간소음 등으로 인한 갈등도 뉴스를 통해서 쉽게 만나게 된다. 다만 아파트로 대표되는 이런 주거환경이 완전히 사라져야 할 절대악은 아니다. 프라이버시가 중요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이제 받아들여야만 하는 대세다. 하지만 완전한 단절 대신 이웃의 존재를 인식할 만큼의 소통 방식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서로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배려 또한 가능한 좀 더 나은 주거환경이 가능하지 않을까. 엘리베이터에 붙은 메모 한 장이 만들어낸 변화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서필웅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