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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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제도 변화에 맞춰 법·판례도 바뀌어야” [차 한잔 나누며]

호주제 폐지… 사실·동성혼 증가 / 기존 법률로는 보호받기 힘들어 / 노인 연령 상향은 복지와 연결 / 경제수준 등 고려 새 기준 정해야 / 지적 판단능력 저하로 사건·사고 / 법원·검찰 양형 재량 영역 확대를
“호주제가 폐지되고 부부가 이혼은 하지 않은 채 서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졸혼’이란 신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가족 형태가 탄생한 만큼 관련 법률과 판례도 바뀌어야 합니다.”

28일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만난 사봉관(50·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1997년 서울북부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해 약 20년간 법복을 입었다. 2016년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지난해 지평이 설립한 ‘노인법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법무법인 지평 ‘노인법실무연구회’ 회장인 사봉관 변호사가 28일 기자와 만나 노인법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요즘 사 변호사의 관심사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탄생이다. 기존의 법률과 판례로는 보호가 힘든 만큼 가족관계에 관한 법률과 판례도 변할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호주제가 폐지됐고 부성주의가 깨졌어요. 사실혼과 동성혼이 등장하고 졸혼도 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유언 형식과 유류분 제도 등 과거 법률과 판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언자 의사 등을 중시하는 등 새로운 법률 등을 통해 이런 가족형태도 보호해야 합니다.”

연구회는 변호사 2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노인·가사상속 관련 법률을 자문하고, 해외 법률·국내 판례 등을 연구한다. 매달 한 차례씩 세미나도 연다.

“급격한 고령화로 ‘황혼 이혼’ 등 법률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법관 시절 ‘자이니치’(在日·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일본에 사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일컫는 말)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들의 국적회복 문제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령화한 해외동포들, 국내 노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연구회는 일본, 미국 등에 사는 고령의 동포들한테 한국 국적을 회복시켜주는 문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자이니치의 경우 재일교포 변호사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협업해 이들의 상속·신분·호적 문제 정리 등을 돕는다. 최근에는 사할린 동포 등 고려인들을 법률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찾는 중이다.

“자이니치 신분으로 있다가 일본 국적을 취득한 노인을 상담했습니다. 국내에 부인이 있었는데 호적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일본에 가서 일본인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은 거죠. 고령인 이분들은 국내의 재산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죽기 전 자신의 호적과 신분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 변호사는 노인의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사회가 노인들을 후견 대상이 아닌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긍정적 역할을 부여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노인을 후원하고 그 생존을 지원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과거 한 마을의 어른으로서 지녔던 적극적 모습이 다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노인복지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어른의 경험, 인격 등을 보고 배우면 사회가 바람직해질 것입니다.”

올해 초 일본 정부는 현재 65세인 고령자(노인) 기준 연령을 수정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비슷해 ‘노인 기준 연령을 올려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다만 정부는 재원 문제로 기준 연령 상향을 고민하는 중이다.

“노인 연령을 올리는 것은 교통비 지원과 연금 수급, 의료 등 복지 개시 연령과도 연결됩니다.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상징적인 노인 연령을 정하고 경제적 수준 등에 맞춰 다양한 형태로 노인 연령 기준을 정의해야 합니다. 노인들도 개개인마다 형태가 다양합니다. 흔히 노인산업을 실버산업이라고 하는데 부유한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노인도 있으니까요.”

최근 할아버지가 몰던 차에 치인 손녀가 사망하는 등 과실로 인한 노인들의 사건·사고가 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노인 범죄 중에서도 교통사고가 가장 많다. 노인들은 노화로 지적 판단능력이 떨어진 만큼 ‘촉법소년’과 유사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이에 사 변호사는 노인 범죄의 경우 획일화된 감형보다 양형 재량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감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인도 노화로 지적 판단이 미숙해졌다면 충분히 양형요소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다만 촉법소년처럼 특정 연령으로 획일화한 기준을 세우기보다는 법원과 검찰이 자율적으로 양형 재량 영역을 확대하는 게 필요합니다.”

사회는 갈수록 고령화하는데 우리는 아직 노인 문제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 영화 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푸념이 나올 지경이다. 사 변호사는 “노인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선 노인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젊은층과 노인, 노인 대 노인 등 향후 노인과 관련된 법률분쟁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미리 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