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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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정치인의 새해 인사

정치를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억력을 빼놓을 수 없다. 좋은 정치의 필수 요소는 소통과 설득이고, 그것을 위해선 기억력이 없어선 안 되는 까닭이다. 고대 로마의 교육자 쿠인틸리아누스가 그 이치를 깔끔히 정리했다. “연설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기억”이라고.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는 한꺼번에 들은 이름 2000개를 술술 읊었다고 한다. 시 구절도 200줄씩 거꾸로 암송했다. BC 4세기에 페르시아를 지배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리스에선 ‘므네몬’으로 통했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통하는 별명으로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다. 페르시아의 모든 병사 이름을 줄줄 뀄다는 얘기도 있다.

기억력은 현대 정치에서도 큰 동력이다. 영국의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메모도, 연출도 없이 30분 동안 첫 당수 연설을 해 찬사를 받았다. 기억력 없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 캐머런이 훗날 ‘공정 인사’ 논란이 불거지자 ‘낙하산이 뭐가 나쁘냐’는 발언을 한 것은 아이러니다. 스스로 ‘빈부차, 계급차 없는 나라’를 역설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어 헛발질을 했다.

‘내로남불’이 영국만의 추태인가. 국내 정치의 숙환이 된 지도 오래됐다. 왜 정권이 교체돼도 계속 내로남불인가. 역시 기억력과 직결된다. 자기가 한 말조차 뇌리에 없으니 아수라장을 빚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첫날 남산 해맞이 길에서 “풍요와 복이 가득 들어오면 좋겠다”고 했다. 같은 날 현충원을 찾은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방명록에 “위대한 국민, 다시 뛰는 대한민국”이라고 썼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새 판, 새 정치, 새로운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하나같이 각별한 의지와 염원을 담은 새해 인사 혹은 덕담으로 봐도 무방하다.

정치인의 새해 인사는 다 듣기에 좋다. 실행을 위한 노력이 뒤따르면 올해 정치는 밝아지고 민생은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에 교집합이 있는지 의문이다. 또 교집합이 있다 해도 박수를 보내기엔 이르다. 그 좋은 말을 잊지 않을 기억력이 있는지도 관건이니까. 대개 이 대목에서 넘어져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내로남불 추태를 되풀이하는 것 아닌가.

이승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