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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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눈물의 비디오’ 다시 틀고 싶나

소득주도성장의 실상 외면한 채 / ‘정책 방향 옳다’ 강변한 대통령 / 과거 돌아보는 성찰의 힘으로 / 현실 직시하고 실사구시를 해야
서양의 1월 명칭은 야누스(Janus)로부터 왔다. 영어, 독어, 불어가 다 그렇다.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이다. 두 얼굴로 과거와 미래를 본다.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는 성찰의 힘 없이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도 생길 까닭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신년회견에서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올해는 국민의 삶 속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확실히 체감되도록 하는 게 목표”라는 발언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봉쇄한다. 혜안이 담긴 발언인가. 안타깝게도 과거에 대한 성찰이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소주성의 핵심인 임금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이승현 논설고문

청와대는 대한민국을 임금 급등 DNA가 없는 나라로 여긴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운운할 까닭이 없다. 실제 그렇다면 눈이 어두운 것이다. 최저임금제가 처음 시행된 1980년대 후반 상황을 돌아보자. 87년 헌정체제 수립과 더불어 노사분규가 거세졌고 임금은 치솟았다. 김대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덫에 걸린 한국 경제’에서 큰 그림을 간결히 정리했다. “호황기에 마구 올랐던 임금은 불황기에도 계속 올라 1987년 이후 10년 동안 4배가 됐다”고.

당시 임금 증가율은 인상적이다. 김 전 실장 집계에 따르면 1987년 10.1%를 시발로 88년 15.5%, 89년 21.1% 올랐다. 경제성장률이 89년(6.8%) 꺾이기 시작했는데도 고공행진은 계속됐다. 성장률을 웃도는 임금 잔치였다. 구체적 수치로는 이렇다. 93년 12.2%(임금) 대 6.3%(성장), 94년 12.7% 대 8.8%, 94년 11.2% 대 8.9%….

문재인정부가 신성시하는 소주성 원리대로라면 국운은 이때 확 펴야 했다. 임금 상승→내수 활성화→성장의 선순환으로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됐을 테니까. 실상은 딴판이다. 먼저 중소기업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국내 경공업 경쟁력은 초토화됐다. 대기업들도 줄초상이 났다. 파산의 도미노였다. 그 끝에 뭐가 있었나. 초대형 고용 붕괴가 초래된 97년 외환위기였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고, 제일은행은 ‘눈물의 비디오’를 만들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 있어도 30년 전은 너무 아득해 못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난해 지표라도 냉정히 살펴볼 일이다. 통계청 발표만 봐도 한 해 취업자 증가 폭이 9만7000명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시달리던 2009년 이후 가장 낮지 않았나. 직전 연도의 3분의 1이다.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인 비농업 민간 일자리는 1만6000개 줄었다. 세계적으론 호황이었으니 대외 요인에 핑계를 댈 것도 없다. 소주성 정책 실패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참담한 지표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은 집은 거덜나게 마련이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닥치고 인상’이 능사가 아니다. 마차가 말을 끄는 역설이 되고 만다. 소주성의 태생적 결함이 여기에 있다. 30년 전을 봐도, 지난해를 봐도 결론은 뻔하다. 더 늦기 전에 정책기조를 총점검해 실사구시를 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옳은 방향’이라고 한다. 여당 지도부와 가진 오찬에선 “경제 실패 프레임이 워낙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성과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거듭 혀를 차게 된다.

동양신화엔 야누스보다 더 특이한 존재가 있다. 북쪽 대황산에 사는 삼면인(三面人)이다. 얼굴이 셋인 불사의 존재다. 정부가 삼면인 얼굴을 가져 두 얼굴로 과거와 미래를 본다면 나머지 하나로는 뭘 봐야 할까. 동시대 상황이다. 소주성 같은 정책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한 나라가 있는지 지구촌을 둘러봐야 하는 것이다. 성공 사례를 찾을 수 있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국내외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책기조를 비판하겠나. 한사코 소주성 깃발만 흔들면서 달려가는 것은 위험하고 무책임하다. 누가 뭐라 해도 가던 길을 더욱 힘차게 가겠다고? 그렇다면 미국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의 경구라도 곱씹을 일이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는.

이승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