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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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스카이캐슬’보다 잔인한 현실

얼마 전 친한 교수 A로부터 자식을 제자로 들여 논문 실적을 쌓아주며 의학전문대학원에 합격하도록 조력한 부모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A는 부모의 도움으로 쉽게 명문 로스쿨 입학, 내로라하는 기업 취업은 물론, 교수로 임용된 사례까지 줄줄이 읊었다. 자식 취업을 위해 직업윤리는 저버리고 직접 ‘취업 코디’로 활약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요즘 열풍인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떠올랐다.

상위 0.1%의 숨 막히는 입시전쟁을 다룬 ‘스카이캐슬’은 시청률 20%대를 가뿐히 돌파하는 등 화제 몰이를 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서울의대’에 합격시키기 위해 수십억원을 들여 입시 코디를 고용하는 등의 설정은 다소 과하다. 하지만 자식에게 남들이 선망하는 ‘명문인생’을 다그치며 타인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자 애면글면하는 부모들의 모습, 처연한 가족 이기주의는 나이를 초월해 시청자들의 감성에 소구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사실 드라마 속 부모들보다 ‘현실 부모’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더 잔인하다. 현실 부모에게 입시전쟁은 서열 경쟁의 서막 정도일 뿐이다. 명문대로 간들 좋은 일자리 구하는 건 녹록지 않다. 만사태평 무던함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대학 친구 B조차 ‘학점 천재’들만 모여 있는 로스쿨 입학 후 돌연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생겼다며 ‘눈물겨운 경쟁사’를 토로한 바 있다. 결국 숙원대로 판사가 된 B는 예전의 무던함을 되찾기는커녕 “임용 뒤가 진짜 제대로 된 경쟁의 시작”이라며 독기를 내뿜는 반전을 선보였다.

서열 경쟁이 지속하면서 마모되고 변해가는 건 부모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명문대 갔다던 아들, 지금은 어디서 뭘 하냐”, “사시 수석 합격했다는 네 딸은 어느 집안 누구랑 결혼했냐” 등 각종 모임에서 자식들의 프로필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이를 통해 부모들의 위치까지 이악스럽게 저울질하려 드는 이들 속에서 그 모든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쉽지 않다.

실제로 명문대를 강요하기는커녕 공부하란 잔소리 한번 하지 않을 만큼 ‘민주적인 교육철학’을 지녔던 절친 C의 어머니 D의 최근 변신이 충격적이다. 공부 머리가 꽤 있었던 C는 명문대 졸업 후 본인이 뜻하는 바대로 벤처기업을 차렸는데 얼마 전부터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반전에 밤잠까지 설치고 있다는 것. 갑자기 D가 보다 이름 있는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 결혼 승낙은 절대 없다며 현재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종용하고, 미래 배우자의 직업까지 관여하려 든다는 것이다. 본인이 싫다고 해도 강제로 의대를 보냈어야 했다며 과거의 ‘교육철학’을 후회하는 발언까지 수시로 한다니 나이 이순에 갑작스런 반전이다.
김라윤 사회2부 기자

듣자 하니 60대가 된 엄마들도 모이기만 하면 자식 자랑 등을 나눈다는데, 어쩌면 매번 새 잣대로 서열 경쟁에 돌입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명문대 졸업한 네 딸, 이름 없는 회사 차렸다더라” 등의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어쩌면 주변 부추김에 딸이 명문대 간판에 걸맞은 회사에 다니며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다는 진부한 욕망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사회에 만연한 서열주의 경쟁에 영향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멋있는 인생의 롤모델을 자꾸 잃는 것만 같아 마음이 쓰리다.

김라윤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