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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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노벨상의 품격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는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화학비료 제조의 기반인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명해 세계 식량생산 증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이후 행보는 정반대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개발하고 사용을 주창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는 악명까지 얻었다. 애국심이 양심을 가린 탓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수용소의 유대인 학살에 쓰인 독가스 치클론B가 그의 발명품이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자신의 발명품이 동족 홀로코스트에 악용될지 상상이나 했을까.

 

인류에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벨상의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면 상을 취소해야 정상인데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노벨상만큼 영광스러운 상도 없다. 그렇지만 1901년 첫 시상 이래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적격 여부나 정치·문화적 편향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노벨평화상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191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휴 루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 외교협회(CFR)를 설립하고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선린우호정책에 성공하는 업적을 남겼다. 필리핀 점령 정책을 입안해 미국 역사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것은 과오다. 미국 점령기(1899~1902년)에 필리핀인 120만명이 피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미국 뉴스위크는 “몇 명이 노벨평화상의 권위를 훼손시켰다”며 불명예 1위에 루트 전 국무장관을 올렸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자격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베트남전쟁 주역인 그는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평화협정은 2년 뒤 베트남 공산화를 앞당긴 실패작으로 결론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북한과의 긴장 완화를 근거로 추천서 작성까지 부탁해 눈총을 받고 있다. 트럼프만큼 미국 위상을 약화시키고 동맹국들을 홀대한 미국 대통령이 또 있을까. 북한 비핵화 협상 하나가 잘돼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면 노벨상의 품격은 또다시 추락할 것이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