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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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미륵사지 석탑

일제강점기인 1910년 12월 전북 익산에서 도쿄대학 교수 세키노 다다시는 붕괴 직전의 석탑 조사를 담당했다. 석탑의 뒷면은 이미 무너져 내렸고, 앞면도 6층만 남아 있었다.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해 고임돌을 받쳐놓을 정도로 석탑은 구조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15년 붕괴 직전인 탑 뒷면에 시멘트 185t을 발랐다.

현대적 의미의 시멘트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개발됐고 그로부터 50년 뒤 미국에서 상업화에 성공했다. 형체가 흉물스럽긴 해도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나름 최신 공법과 재료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콘크리트는 탄산칼슘 성분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화강암의 표면이 하얗게 변해 부서지게 만드는 백화 현상과 풍화작용을 촉진한다. 석탑 붕괴는 막을 수 있었지만 문화재 훼손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훗날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이렇게 1400여년간 간난신고의 세월을 버텨왔다. 백제 무왕(600∼641년 재위) 때 지어진 높이 14.2m, 사방 길이 12.8m의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1998년 12월 안전진단에서 붕괴 위험이 있다는 판정을 받고 1999년 4월 해체 정비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예상 공기(工期)는 10년. 그러나 그 기간은 한없이 늘어났다. 해체에만 10년이 걸렸고, 복원까지는 무려 20년이 걸렸다. 한국에서 단일 문화재 해체·복원에 이 정도 시간이 걸린 전례가 없다. 마침내 복원 공사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이 4월 일반에 공개된다고 한다.

미륵사는 무왕과 혼인한 선화공주가 창건한 사찰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9년 해체 공사를 마친 서탑에서 ‘절을 세운 이는 백제 좌평(16관등 중 최고벼슬)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왕후’라고 새긴 명문이 발견됐다. 선화공주인지 사택적덕의 딸인지, 미륵사 창건 주체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탑의 높이를 두고도 7층설, 9층설 등이 분분하다. 복원공사는 마쳤지만 미륵사지 석탑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박창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