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에 지친 당신을 위로하는 '소리'… 'ASMR' 뜬다 [S스토리]

#.1 깜깜한 밤 비 내리는 놀이터. 얇은 옷차림의 한 여성이 우산을 내팽개친 채 놀이터 구석에 웅크린 상태로 굵은 빗줄기를 하염없이 맞고 있다. ‘투두둑 툭 두둑…타닥타닥…토도독 톡톡’.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하늘을 한 번 바라본 여성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층 굵어진 빗발에 온몸을 맡긴다. 일어서고 앉기를 반복하던 여성은 어느새 놀이터 중앙에 나와 앉아 비를 맞고 있다. 그 사이 하늘은 개고 나뭇잎 사이로 찬란한 빛줄기가 내리쬔다. 이어 ‘각자의 무게로 힘든 모든 분께 당신의 비를 같이 맞아줄게요’라는 자막이 조용히 뜬다. 오로지 빗소리만 가득한 이 영상의 조회수는 17만회. 힐링을 주제로 다양한 자율감각쾌감반응(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영상을 만드는 유튜버 미니유(Miniyu)의 작품이다.

 

#.2 간호사로 보이는 한 여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환자에게 답답한 마음이 얼마나 지속하는지, 속에 돌덩이가 얹힌 느낌이 드는지 등을 묻고 있다. “오늘은 몸속 화를 제거하는 수술을 진행할 거예요. 수면마취 상태에서 최소한의 절개를 통해 화를 꺼냅니다.” 이 여성은 환자에게 잔뜩 화가 난 표정의 한 초상화를 보여주며 “이게 환자분 상태인데 수술 후엔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다독인 뒤 수술실로 자리를 옮긴다. 심박수 모니터 소리, 메스 부딪치는 소리 등이 길게 이어지더니 수술복을 입은 유튜버가 핏덩이처럼 보이는 큰 나뭇잎 하나를 들어 보이며 화병 제거 수술이 정상적으로 끝났음을 알린다. 우울한 느낌의 초상화는 어느덧 활짝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다.(유튜버 하쁠리의 영상 중 일부)

 

국내에서는 각종 음식을 맛깔스럽게 먹는 ‘먹방 ASMR’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소리’를 의미하는 청각 중심의 콘텐츠 ASMR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파도 소리, 빗소리, 모닥불 타는 소리 등 각종 자연의 소리는 물론 다양한 상황극을 펼치며 가상의 1인칭 화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힐링 ASMR’, 입술의 부딪침과 호흡 등 몸 고유의 소리를 통해 팅글(tingle·기분 좋게 소름이 돋는 느낌)을 연출하는 ASMR 등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ASMR의 유행이 초연결사회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카톡감옥’으로 대변되는 ‘초연결 사회’에서 사람들은 외부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기내면과 감각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상업코드가 없는 청각 콘텐츠에 흠뻑 빠져 자발적 고독을 즐기고, 파도 소리 등 ‘지금 현실’과 동떨어진 도피처에서 조용히 묵상을 즐기려는 심리가 자극적 콘텐츠가 난무하는 시기에도 ASMR의 인기를 키우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아픈 청춘’ 20대가 ASMR에 빠졌다. ‘내추럴 본 디지털세대’인 동시에 현란하고 즉각적인 문화 콘텐츠를 즐길 것으로 여겨지는 20대들이 자연과 느림, 명상으로 대표되는 ASMR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20대는 어떤 종류의 ASMR를 얼마나 자주 즐기고 있을까. 세계일보가 최근 전국 20대 대학생 193명을 대상으로 ASMR에 대한 직접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마음의 평안과 대리만족을 주는 ASMR

 

15일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3.3%인 180명은 ASMR 콘텐츠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13명만이 ASMR를 ‘들어본 적이 전혀 없다’고 응답했다. ASMR를 ‘거의 매일 듣는다’고 답한 대학생은 15%였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주기적으로 듣는다’고 답한 대학생도 43.3%에 달했다. ‘한 달에 한 번’은 15%, ‘2~3개월에 한 번’은 12.8%였다.

 

어떤 종류의 ASMR를 즐겨 듣는지도 물었다. 요즘 유튜브 대세인 ‘먹방’의 소리 버전이 가장 많았다. 응답자의 55.4%인 107명이 ‘음식 먹는 소리’를 즐겨 듣는다고 했다. 이어 파도와 바람과 같은 ‘자연의 소리’가 47.2%(91명),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소리’(33.2%)의 응답률이 높았다. 위로의 말 등 힐링에 도움을 주는 ASMR 비중이 30%(59명)로 높은 편이었다. 이밖에 ‘물건 등을 두드리는 소리’(11.9%), ‘신체를 이용한 각종 소리’(2.6%)를 듣는다는 대학생도 있었다.

 

대학생 이유민(25·여)씨는 즐거운 상상을 위해 ‘자연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 답했다. 이씨는 “평소 취업 준비 등으로 바빠서 여행을 잘 가지 못한다”며 “그럴 때마다 파도 소리나 모닥불 타는 소리 등을 들으며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고 했다. 그는 여행 관련 TV 프로그램들은 시각적 자극 때문에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을뿐더러 내면에 집중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이씨는 “ASMR가 과거 기분이 좋았던 여행 추억을 오롯이 떠올리게 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소리로 ‘음식 먹는 소리’를 꼽은 김예지(21·여)씨는 “평소 맛보기 힘든 음식들, 특히 소리가 특이한 음식들만 선별해 먹방 ASMR 영상을 올리는 유튜버가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김씨는 “(돈도 없고, 다이어트도 걱정되던 차에)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일종의 ‘일탈’을 감행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주로 어떤 목적으로 ASMR 콘텐츠를 소비하는가’에 대한 질문(복수응답)에는 응답자의 63.2%(122명)가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꼽았다. ‘호기심 충족’은 33.2%(54명), ‘대리만족’은 31.6%(61명)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어 ‘불면증 치료’(23.3%), ‘위로와 힐링’(22.3%) 등의 순이었다.

 

대리만족을 주는 ASMR 콘텐츠를 즐겨 찾아본다는 이수지(가명·23·여)씨는 “삭막한 사회에서 진짜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찾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이씨는 “물론 유튜버가 나에게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며 “하지만 속삭이듯 내 일상을 묻고, 내 머리를 손질해 주고, 고개를 끄덕이는 등 힘든 내 마음에 공감해 주는 듯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삭막한 일상에서 괜찮은 친구 한 명을 얻은 듯이 기쁘고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정학용(24)씨는 불면증 치료를 위해 ASMR를 즐겨 본다. 정씨는 “취업 걱정 때문에 잠드는 게 너무 힘들다”며 “아예 내가 놓인 환경과 전혀 다른 곳에서 나는 계곡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바닷소리 등을 듣고 있으면 어느 정도 생각의 고리를 끊고 불안, 두려움도 잊을 수 있어 잠이 잘 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이 청각 자극에 몰두하는 이유’를 물었다. ‘스트레스 및 불안 해소’와 힐링, 위로가 73.6%(142명)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대리만족은 66.3%(128명)로 뒤를 이었다.

 

유튜브에서 Soy ASMR을 운영하고 있는 김소연(27·여)씨는 “한국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들으며 위로받길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점점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받길 원하는 연령대가 내려오는 것 같은데, 그런 분들께 자장가도 불러주고, 마치 일 대 일로 위로받는 느낌이 들게 속삭이듯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ASMR채잉’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김채언(19·여)씨는 “학교에 가면 영상 잘 보고 있다며 덕분에 불면증이나 우울증이 나았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낄 때가 많다”며 “사람들에게 언제든 힘이 들 때 있는 그대로를 받아줄 수 있는 안전한 존재라는 느낌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상황극에 가상소리까지… 진화하는 청각 콘텐츠

 

ASMR의 ‘대세’ 콘텐츠는 ‘먹방’이다. 식탐을 자극하고, 다이어터에게는 대리만족을 안긴다. 하지만 ‘힐링과 위로’에 방점을 둔 ASMR도 꾸준히 늘고 있다.

 

세계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10명의 대표 ASMR 유튜버 스타들 역시 대체로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힐링을 줄 수 있는 콘텐츠 기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는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소리를 만들거나 상황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 ASMR 영상을 보며 위로를 받은 뒤 큰 영감을 받아 스스로 힐링할 수 있는 소리를 제작하다 보니 어느새 몇십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리는 스타 유튜버가 돼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유튜버 BJ 여운

다양한 상황을 감안한 역할극을 선보이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유튜버 BJ 여운(본명 김태진·28)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주는 다양한 ASMR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다. 여운은 “늦은 밤 잠이 안 와 뒤척이는 친구를 토닥거리거나 상심이 큰 여동생을 위로하는 영상 등 사람들의 고민을 묻고 공감해주는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불이 다 꺼진 상태에서 속삭이는 듯한 어조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그 위로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전달되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처럼 느껴질 수 있다”며 “ASMR의 심리적 효과가 배가되는 셈”이라고 했다.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유튜버 이월묘(본명 이한이·22)도 “사람들이 잠들기 전 해석과 상상의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며 “특히 기존에 다른 유튜버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반전 플롯이 담긴 콘텐츠들도 많이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유튜버 은젤.

유튜버 은젤(오은비)은 식용 수세미, 딱풀, 빗, 비누 등 톡톡 튀는 먹방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 은젤 역시 자신의 콘텐츠 장점으로 ‘힐링’과 ‘대리만족’을 꼽았다. 그는 “가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있는 저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 시청자들이 ‘걱정, 숙제, 회사, 불안, 학교 등을 먹어 달라’는 재미있는 요청을 해 오곤 한다. 아마 식용이긴 하지만 파격적인 시도를 하는 제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하시는 분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고 했다.

 

튜브 ASMR계에서 ‘입소리의 장인’으로 통하는 재인(ASMR 재인 운영)은 “요즘은 단순히 있는 소리를 정확히 녹음해 들려주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공심장 소리 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ASMR의 인기가 높아지는 이유로 “아무래도 인공심장 소리 등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더 잘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유튜버에서 ‘불면증 치료실’을 운영하고 있는 ASMR유튜버 김인주(32)씨도 “예전에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상황을 응용해 양수의 움직임 소리를 재현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셨다”며 “꼭 실재 존재하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한번은 경험하고 싶은 가상의 상황에 놓인 듯 느낌을 받게 하는 가상의 소리 들을 만들어 즐거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자연의 소리 알파파 촉진… 뇌가 쉬는 느낌 줘

 

자극적인 영상콘텐츠가 봇물을 이루는 요즘, 청각 위주의 저자극성 자율감각쾌감반응(ASMR)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복잡다단한 외부자극에서 한발 물러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찾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다시 아날로그 ‘청각자극’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연의 소리 등 기분 좋은 소리의 반복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실 속 걱정을 잠시 끊어주는 ‘차단막’ 효과를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홍 교수는 “흔히 조용하면 잠이 잘 올 것 같지만 오히려 낮 동안 불쾌감을 줬던 온갖 자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면을 방해할 수 있다”며 “주의를 돌리는 데 ASMR가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ASMR는 대체로 청각 위주의 기분 좋은 자극을 주기 때문에 머릿속에 있는 좋은 추억들을 쉽게 떠올리게 하고 내적인 심상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기분 좋은 감각과 감정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과 휴식에 효과적이다. 홍 교수는 복합적인 자극의 콘텐츠를 접할 경우 내면에 집중하기보다는 외부 자극에 휘둘릴 개연성이 커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최근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위로를 주는 각종 상황극’ 콘텐츠는 일종의 최면치료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같은 소리일지라도 “당신을 위해 비를 맞아준다”는 위로를 건넨 뒤 빗소리를 들려준다면 피암시성이 높은 상태에서 마치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남이 떠안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비 맞아 드립니다' 영상 캡처

자연의 소리는 알파(α)파 발산을 촉진한다. 알파파는 주파수가 8∼13Hz인 뇌파로 정상적인 성인이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상태에서 생긴다. 서유헌 가천대 뇌과학연구소장은 “일에 지친 현대인에게 자연의 소리는 특히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소장은 “낙엽 밟는 소리, 미풍이 부는 소리, 파도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등은 흔히 휴식할 때 나오는 알파파를 촉진하기 때문에 뇌를 쉬게 하는 느낌을 준다”며 “그만큼 자연스럽게 일 걱정을 떨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청각 콘텐츠들이 인기를 끄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감각 콘텐츠 홍수 시대의 피로감’ 측면에서 ASMR 콘텐츠의 인기를 분석했다. 설 교수는 “대부분의 TV 콘텐츠들이 시청자들에게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수많은 자막과 효과음을 넣는데, 그런 자극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많이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히려 눈을 감고 소리 자극에 귀를 기울일 때 묵상과 명상이 가능해지면서 마음이 보다 차분하고 고요해지는 효과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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