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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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권력에 취하는 권력

네댓 살 아이의 눈에 국가권력은 어떻게 비칠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까.

지방 경제가 엉망이다. 울산도 대표적인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울산의 조선소에서 일하던 매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경기가 바닥을 치고 일감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동남아의 어느 나라로 돈 벌러 갔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매제의 어린 딸(기자에겐 조카)이 엄마(기자에겐 여동생)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랑 헤어졌어?”

박현준 정치부 기자

아빠가 몇 달이나 안 보이니 아이가 오해한 것이다. 아이가 걱정할까 싶어 매제가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왔음은 당연지사다. 돈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따뜻한 성장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웃음이란 그런 것이다. 몇 년 전에 여동생에게서 들은 얘기다.

청와대 담당 기자로 발령나고 얼마 되지 않아, 김현철 대통령 경제보좌관이 “동남아 가라”고 했다가 옷을 벗었다. 청와대 참모들이야 답답했을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경제 정책을 세웠는데도 사람들이 안 따라준다고 속상했을 것이다.

권력은 무능력할수록, 현장과 멀어질수록 가혹해진다. 권력이 내놓은 거창한 계획을 국민들은 거부한다. 거대한 계획은 사람의 다채로운 삶의 결을 무시해서다. “동남아 가라”는 권력의 언어는 어린아이들의 눈엔 그저 “너희 아빠가 사라져야 한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 국민은 권력을 냉정하게 판단한다. 아이와 가족의 눈으로 정부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섬세하고, 권력의 눈높이는 언제나 낮아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얼마 전엔 청와대가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불렀다. 청년단체 대표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채웠지만, 기자의 눈은 헤드테이블 명단에 쏠렸다. 민변, 참여연대, 경실련처럼 이 정부와 결을 같이 하는 ‘권력단체’들이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다. 이들은 지금보다 더 강한 개혁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했다. “사법 개혁과 권력기관 개혁”(민변), “다양한 개혁 조치들의 반영”(참여연대), “재벌 개혁”(경실련)이 쏟아졌다.

우리 사회가 더욱 사람다운 꼴을 갖추려면 다양한 제안에 열려 있어야 한다. 이들 단체들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들을 건 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판 사림(士林)들의 날 선 개혁론 속에 정작 낮은 곳의 목소리는 쪼그라드는 건 아닌지 고심해 볼 시점이다. 국민들이 왜 최저임금 인상에 울상 짓고, 왜 지방 분권과 자치 경찰을 거부하고, 왜 거대 노조를 비판하는지를 말이다.

노무현정부가 실패한 길을 지금 정부는 경계해야 한다. 개혁의 와중에 개혁의 수혜자여야 할 국민은 사라지고, 권력자와 권력자를 복제한 일부 단체의 소음 같은 구호만 가득했다는 실패 경로 말이다. 권력이 권력에 취하자, 어리고 낮은 국민들은 질겁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르다. 지금 우리야말로 약자를 대표한다”는 왁자한 소음이 권력의 담장을 넘고 있다. 그러나 어리고, 낮은 자리에서는 그저 권력의 ‘술주정’으로 비칠 뿐이다.

 

박현준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