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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란 단어 유난히 애용하는 이낙연 총리, 왜?

공직자로서는 유별나게 '못난'이란 표현 애용 / 봉하마을 방명록에 적은 '못난 이낙연' 압권 / 정치권, "언어 구사력 탁월… 존재감 상승세"

“영관장교가 부하들 고생할까봐 가짜 자수를 시키는 엉터리 같은 짓을 했다가 발각됐는데 참 못난 사람이라 생각한다.”(7월12일)

 

“군에서는 약간 흐리는 관행이 있어 ‘인근’이라고 무심결에 했다고 한다. 국민 눈높이에서 보면 못난 짓이라 질책을 했다.”(7월9일)

 

최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며 쓴 표현이다. 해군 2함대에서 벌어진 거동수상자 가짜 자수 사건에 대해선 주모자인 영관장교를 ‘못난 사람’으로 지칭했고, 북한 목선의 삼척항 ‘프리패스’ 입항 사건 당시 군이 ‘삼척항 인근’이란 표현을 쓴 점을 겨냥해선 ‘못난 짓’이라고 꾸짖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5월23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모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 총리의 유별난 '못난'이란 표현 애용

 

‘못나다’라는 말이 일상에서 비교적 자주 쓰이는 표현이긴 하나 이 총리처럼 이 단어를 애용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얼굴이 못생기거나 예쁘게 생기지 아니하다’, ‘능력이 남보다 모자라다’ 등 지극히 주관적인 나쁜 평가의 뜻을 담고 있어 대개의 공직자는 사용에 부담을 느끼는 용어란 점을 감안하면 눈길이 간다.

 

13일 정치권과 언론계에 따르면 이 총리의 정치 스타일을 가리켜 ‘언어정치’라고 부르는 이가 많다. 단순히 말을 청산유수 잘하는 차원을 넘어 그때그때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 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 9월 대정부질문에서 이 총리는 “긍정적으로 말하면 노회하고, 나쁘게 말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답한다”는 어느 야당 의원의 지적에 “거칠게 표현하는 게 꼭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저의 (답변) 방식은 제가 오랫동안 그려왔던 ‘정치언어’의 한 부분이라고 답했다.

 

발언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신중히 판단하는 스타일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그 때문인지 이 총리는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부터 여권의 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하게 거론됐으며, 최근 여론조사에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마저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7년 10월 월 경남 김해 봉하마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방명록에 쓴 글. 자신을 ‘국무총리’ 대신 ‘못난 이낙연’이라고 불렀다. 연합뉴스

◆봉하마을에서 쓴 '못난 이낙연'이 압권

 

이런 이 총리가 ‘못난’이란 단어를 자주 쓰는 건 우연이 아니고 당연히 의도적 선택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실 ‘못난’이란 표현은 이 총리가 자기 자신을 혹독히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전남지사로 재직하던 2016년 9월 전국체전에 참가할 전남 대표 선수단 앞에서 연설하며 “우리 선수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한스럽다”며 “현재는 전남의 품 안에 있지만, 나중에는 지원이 부족하여 타 지역으로 보내야 하는 못난 부모의 심정을 십분 헤아려줬으면 한다”는 말로 도(道) 차원의 지원이 부실함을 인정했다.

 

총리 후보자 시절 국회 인사청문회에선 “제 못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야당 의원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들의 병역 면제가 논란이 되자 “못난 자식을 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총리 취임 이후인 2017년 7월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씨가 사망한 직후엔 “(김씨가) 못난 저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지만 저는 형님 자격이 없다”며 “아우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것을 몰랐다”고 자책했다.

 

압권은 2017년 10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을 때다. 이 총리는 방명록에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사는 세상, 이루겠습니다”라고 적은 뒤 스스로를 “국무총리 이낙연” 대신 “당신을 사랑하는 못난 이낙연”이라고 불렀다.

 

이낙연 국무총리(왼쪽)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언어 구사력 비범… 존재감 차츰 상승"

 

이 총리는 국무회의 등을 통해 장·차관들의 ‘군기’를 잡는 무서운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장관이 멋쩍은 미소를 짓자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라고 쏘아붙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들고 온 장관에게 “이걸 보고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역정을 낸 것 등이 대표적 사례다.

 

자연히 이 총리가 ‘못난’이란 말을 써가며 비판하는 대상도 차츰 늘어나는 모양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공공 분야 갑질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갑질은 그 갑(甲)이 이끄는 조직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조직 운영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우리 사회의 못난 갑질은 이제 세계적 수치가 됐다“고 꼬집었다. 갑질을 하는 이들을 단칼에 ‘못난이’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마찬가지로 국방부와 군 지휘부가 ‘삼척항 인근’이란 해괴한 표현을 고안해낸 행위는 ‘못난 짓’, 부하인 해군 병사에게 거짓 자수를 시킨 영관장교는 ‘못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치권 주변의 한 인사는 “이 총리가 2017년 10월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묘역 방명록에 ‘국무총리’ 대신 ‘못난 이낙연’이라고 쓴 것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언어 구사력이 비범함을 보여준다”며 “‘언어정치’를 표방한 이 총리의 존재감이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라고 평가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