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기업과 조직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하면서도 일을 계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하게 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전화와 텍스트 메시지는 물론, 화상통화를 사용한 회의, 그리고 다양한 협업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디지털 협업도구들이 개발되어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많은 조직이 당장은 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온다. 사람들은 왜, 언제부터 사무실에 모여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을까?
우선 ‘일’의 정의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몸을 쓰기보다는 머리를 쓰는 지적 노동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회사(company, 함께 모인 사람들)’라는 것 자체가 중세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에, 실내에서 지적인 노동을 하는 공간을 ‘사무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기원은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어에서 ‘스터디(study)’라는 말은 공부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행위를 하도록 별도로 마련한 공간, 즉 공부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말로는 흔히 서재(書齋), 즉 책이 있는 방으로 번역하지만 결국은 모두 ‘(대개는 앉아서) 지적인 작업을 하는 별도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봤을 때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모습이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서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1494)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초기인 3, 4세기에 아프리카 북부에서 태어나 살면서 글을 썼던 로마 사람. 보티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원통형 궁륭을 가진 건물의 아주 작은 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방이라기보다는 벽감에 가까운 이 공간은 필요할 경우 앞에 있는 커튼을 칠 수도, 어두우면 열어서 빛을 끌어들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방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이런 공간을 글쓰기와 같은 지적 작업을 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한 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외부와 차단되어 생각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적인 작업이 천재와 같은 저자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전통적인 지식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이 사람의 저작활동이란 (성경의 저자들이 그랬다고 믿었던 것처럼) 신과 직접 소통을 해서 그 결과물을 옮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급적 아무런 사람도, 물건도 그의 감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중세를 지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일, 혹은 지적 작업의 성격이 새롭게 추가된다. 바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서재처럼 작은 공간에 혼자 머무르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안에 자그마한 서재 공간을 마련해두고 일을 하면 되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야 하는 상황이 되자 특정인의 집에 가서 일을 하기보다는 별도의 대형 건물을 만들어서 (근대적인 의미의) ‘사무실’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유럽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였고, 당연한 얘기지만 등장한 후에도 단번에 확산된 것도 아니다. 가령 세계 대통령 관저의 모델이 된 워싱턴의 백악관이나 영국 총리의 관저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의 경우를 보면 모두 주거지와 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형태다. 보안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기원은 농장주, 영주, 귀족들이 자신의 넓은 저택에서 일부를 일터로 사용하던 습관에 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이 강대국 프랑스, 스페인과 싸우면서 해양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는 과정에서 해군력은 커졌고, 이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독립된 사무실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런던에 위치한 해군본부, 올드 애드머럴티(Old Admiralty) 건물이다. 이를 곧바로 본받은 것이 동인도회사였다. 한때 자체 보유 병력만도 영국 육군의 2배가 넘을 만큼 대규모 조직이었던 동인도회사는 오늘날의 글로벌 대기업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고, 따라서 많은 사무직원을 수용할 장소가 필요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해군본부 건물과 달리 1800년대에 해체된 영국의 동인도회사 건물 역시 마치 의사당을 연상하는 거대한 건물이었고, 이후로 나타날 대기업들의 근무지 형태를 결정하는 모범으로 작용했다.
물론 18세기 당시의 사무실이 현대와 비슷하다고 해도 밝고 환하게 트인 쾌적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책상 사이를 오가며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일을 해낸 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인들이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가장 미국적인” 건축가로 라이트를 꼽는 이유는 그가 유럽에서 건너온 양식을 따르는 바람에 복도를 따라 작은 방들이 이어져 있던 미국의 주택을 넓게 트인 공간으로 바꿔놓으면서 진정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라이트가 일반주택을 개방형으로 바꾸는 작업을 사무실에 도입한 것이 미국 위스콘신주 라신에 위치한 존슨 왁스(현 SC 존슨) 본사 건물이다. 당시 존슨 왁스사를 이끌던 H F 존슨은 “누구나 일반적인 건물은 지을 수 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사무실 건물을 만들고 싶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의 건축가를 모셔와야 한다”고 선언하고 라이트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리고 라이트는 건축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탄생시킨다.
높은 천장을 가진 거대한 사무실의 중간중간에는 둥근기둥이 위로 치솟고 천장은 연꽃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사이의 공간은 유리튜브로 채워넣어서 외부의 빛을 실내 전체에 뿌려준다. 이런 장치들 때문에 많은 라이트의 건물이 그렇듯, 이 건물도 실제 크기에 비해 훨씬 넓고 넉넉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던 라이트의 성격상 이런 멋진 공간에 평범하고 둔탁한 가구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어서 들어갈 가구까지 세트로 함께 디자인했다.
이렇게 활짝 “열어젖힌” 개방형 사무실 공간이 모든 작업에 적합한 공간은 아닐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온갖 소음이 들리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에 성장한 대기업 주도의 자본주의는 혼자서 일하는 직원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활발하게 정보가 흐르는 공간을 선호했고, 존슨 왁스 빌딩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정보의 흐름을 돕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존슨 왁스 빌딩의 사무실이 “20세기 상업과 모더니즘의 전당”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그 때문이고, 지금도 많은 사무실 건물이 같은 아이디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넓은 공간에 함께 모여서 일하는 방식, 그런 사무실 형태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그건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