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영상물을 제작·유포한 ‘박사방’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시민들이 텔레그램에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등 이번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 행동 움직임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1일 이주여성인권포럼에 따르면 이 단체는 최근 ‘n번방 사건에 관해 드리는 편지’를 텔레그램 CEO인 러시아인 파벨 두로프에게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검열받지 않을 자유’를 내세우며 만들어진 텔레그램이 n번방, 박사방 등 사건 가해자의 범죄 창구로 사용되자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수사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취지다. 영문으로 작성된 편지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만 달리해 텔레그램 공식 계정에 보내는 방식이다.
단체가 공개한 편지에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도구를 만들고자 한 텔레그램 개발자들의 원래 취지와 달리, 가해자들은 미성년자가 다수인 피해자들을 위협하고 협박해 성적 노예로 사로잡는 데 활용됐다”며 “텔레그램은 범죄자들이 저지르는 성범죄, 개인정보 침해, 위협과 협박을 방조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내주기를 촉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범죄 가담자의 개인정보와 명단을 한국 검찰에 제공할 것, 불법적인 성관계 영상을 공유 감시하는 감시 규약과 지침을 개발할 것, 텔레그램 성범죄에 관한 입장을 발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운동을 주도한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텔레그램은 독재 정권의 억압에 맞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했다”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성착취나 무기·마약 밀매의 방식으로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책임감 있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일부 활동가도 동참했다. ‘편지 쓰기 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활동가들이 캠페인 플랫폼(빠띠 캠페인즈)을 이용해 캠페인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캠페인 페이지를 개설해 텔레그램 CEO를 포함한 경영진 4명에게 이주여성인권포럼이 작성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했다. 실시간으로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 수와 텔레그램 측에서 응답했는지 확인도 가능하다.
캠페인을 기획한 황은미 활동가는 “n번방 사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이 운동을 접하게 됐다”며 “범죄가 일어나는 플랫폼에 ‘사회적 책임’을 묻고 시민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금진 활동가는 “경영진에게 보낸 이메일이 스팸 처리가 돼 시민들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달까지 진행될 캠페인에 대한 반응을 토대로 경영진의 사회적관계망(SNS) 개인 계정에 메시지를 보내거나 국제 활동가와 시빅해커(시민해킹 활동가)에게도 참여를 촉구하는 등 다양한 방식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의 문제점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총공격)’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들은 지난달 말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같은 시간에 텔레그램을 동시 탈퇴할 것을 제안했다. 탈퇴 사유를 “Nthroom-We need your cooperation(n번방-텔레그램의 협조가 필요하다)”이라고 적어 사건의 실체를 알리려는 목적이다.
n번방 사건과 관련한 정보와 관련 청원 등을 한데 모아 만든 ‘n번방 시민방범대’도 등장했다. 지난달 29일 개설된 이 웹사이트는 대학생 4명이 자체 개발했다. 해당 사이트는 n번방 관련자들의 정보와 적용 죄목, 검거 현황이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된 각종 n번방 청원들과 관련 법안, 최신 뉴스, SNS 및 커뮤니티 반응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운영자들은 “n번방 사건이 버닝썬 사건과 같은 여러 성범죄 사건들처럼 묻히지 않게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지속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게끔 n번방 사건에 대해 모니터링할 수 있는 비영리 서비스를 개발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사건 수사를 위해서는 범행이 이뤄진 텔레그램의 협조가 필수적이지만 국제 공조는 차질을 빚고 있다. 경찰청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회의에서 각국 수사기관과의 협력을 요청하려 했지만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유행으로 상반기 회의가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경찰은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과는 이미 협력 체계를 구축해놓은 상태지만 해외 메신저인 텔레그램의 본사와 서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사용자 정보를 넘기라는 각국 수사기관의 요구를 거부해 온 텔레그램이 이번에도 협조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임종인 고려대 교수(정보보호대학원)는 “이번 사건은 아동 상대 성범죄라는 국제적 공분을 사는 사건인 만큼 우리의 의사 표현이 필요하다”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관련 범죄자를 강력히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 사이버범죄 방지협약에 가입해 국제적 공조를 요청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