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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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소니 아니에요” 여성의 하소연, 법원 받아들였다

“모르고 사고 현장 떠났다면 뺑소니 아냐” 공소기각 판결

‘뺑소니’. 차량 운전자가 운전 중 보행자를 치는 사고를 낸 뒤 그냥 지나가는 것을 뜻한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혐의가 적용돼 가중처벌을 받는 중대한 범죄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전경

그런데 책임을 지기 싫어 ‘나몰라라’ 하고 도망친 경우와 달리 본인이 사고를 낸 사실을 전혀 모른 현장을 떠났다면 어떻게 될까. 검찰에 의해 뺑소니 사범으로 몰려 재판에 넘겨진 이가 대한법률구조공단 도움으로 “사고를 낸 사실을 모르고 현장에서 벗어났다면 뺑소니 사범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내 눈길을 끈다.

 

22일 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A(여)씨는 2019년 1월 어느날 자정 무렵 부산 해운대구의 주택가 이면도로를 달리던 중 차량 조수석 측면으로 보행자 B씨의 허벅지를 치었다. 쓰러진 B씨는 어깨 쇄골 부위가 골절되는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A씨는 B씨에게 사과하고 합의도 했다. 다만 “사고 발생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뺑소니 혐의만은 극구 부인했다.

 

결국 뺑소니 사범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된 A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한부모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행여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아 교정기관에 수감되기라도 하면 가족 생계가 막막해졌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법률구조공단의 문을 두드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법률구조공단 측은 A씨의 하소연에 타당한 점이 있다고 판단해 공단 소속 강청현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겼다.

 

강 변호사는 1심 재판에서 “A씨는 사고 당시 어두운 밤에 주택가 이면도로에서 전조등을 켜지 않은 채 차량을 운행하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였으며, 당시 피해자 B씨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병원 진료기록을 들어 “A씨가 사고 수일 전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신이 쇠약한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A씨를 상대로 한 거짓말탐지 결과에선 ‘사고를 몰랐다’는 질문에 진실 반응이 나왔다.

 

결국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1심에서 A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를 기각했다. 공소 기각은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으로 검찰 입장에선 ‘무죄’ 판결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다.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재판부는 “운전자가 교통사고 발생사실을 인지한 경우에는 차량을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사건 폐쇄회로(CC)TV에서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충격한 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며 “피고인이 사고 발생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법률구조공단 관계자는 “한부모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건강마저 좋지 않은 여성이 억울하게 뺑소니범으로 몰려 오랜 기간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했다”며 “이런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당국은 조금 더 면밀히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