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트럼프 ‘감축’ 엄포 현실화 우려… 안보 환경 변화에 대비해야 [세상을 보는 창]

수면 위 떠오른 주한미군 감축론 / 트럼프, 駐獨미군 9500명 감축 발표하며 / 다른 동맹국들에도 언제든지 적용 시사 / 볼턴 “트럼프, 방위비와 철군 연계 지시” / 문정인 “미군 감축, 비핵화 협상 카드 가능” / 與 종전선언 결의안, 자칫 빌미 줄 수도 / “북한 위협 상존… 미군 철군 난망” 시각도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최근 독일 주둔 미군 감축 조치 등을 둘러싼 미국 행정부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탓이다. 여기에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공개가 불을 지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의회가 주한미군 규모를 현 수준인 2만8500여명 선에서 유지하는 내용의 2021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처리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트럼프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우려한 일종의 견제라는 분석이다. “(미국이 보는) 세계사적 흐름에 한국은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주한미군 감축 역시 미국의 판단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문제다.” 주한미군 한 관계자는 29일 “지금 당장 주한미군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군은 준비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나 미국 내 여론에 따라 한반도에서 병력을 감축하든지 아예 떠날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한미군 내부도 술렁이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 경찰론 폐지… 시작은 ‘주독미군 감축’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찾아 한 참전용사와 거수경례로 인사하고 있다. 워싱턴=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간) 뉴욕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식에서 “많은 사람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머나먼 땅에서 벌어지는 오래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미국 병력의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은 미국 우선주의와 신(新)고립주의를 표방하며 ‘세계경찰론 폐지’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공약을 재확인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남측과의 ‘확실한 결별’을 선언하고 대남 군사행동에 나설 것을 시사한 직후라 더 주목을 받았다.

곧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16일 독일 주둔 미군 병력을 2만5000명 규모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주독미군 규모인 3만4500명 중에서 9500명을 줄인 수치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독미군 감축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독일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충분한 방위비를 지불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들(독일)이 돈을 지불할 때까지 우리는 대략 절반 정도의 군대를 (독일에서)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나는 독일에 관해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많은 나라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라며 미군 주둔 동맹국을 향해 엄포성 발언을 했다. 방위비 협상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의 주한미군도 언제든지 뺄 수 있다는 압박으로 여겨졌다.

앞서 11일에는 트럼프 대통령 측근인 리처드 그리넬 전 독일주재 미국대사가 독일 일간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독미군 감축 계획을 언급하면서 “미국 국민들은 타국의 방위에 세금을 너무 많이 내야 한다는 점에 다소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주독미군 감축은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 이라크, 한국, 일본 등 여러 곳에서 병력을 미국으로 복귀시키는 트럼프 대통령 계획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거들었다. 외신들은 “(주독미군 감축은) 동맹이 방위비를 더 분담해야 한다”는 ‘미국 우선주의’ 연장선에 있는 결정으로, 미 행정부의 해외 미군 감축 드라이브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볼턴 회고록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돈벌이’로 전락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국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미국이 왜 한국을 지켜주느냐”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연합훈련 중단, 방위비 분담금 인상 문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미군 주둔에 대한 불만 타령이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심지어 한반도와 무관한 현안을 다룰 때도 종종 주한미군을 들먹였다.

2018년 11월 중간선거 직후 외교안보 고위 인사들과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논의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갑자기 “그런데 왜 우리가 한국을 북한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 1월 시리아 미군기지 문제를 논의하던 자리에서도 뜬금없이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싸운 뒤 우리가 왜 아직도 거기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볼턴 전 보좌관은 전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서 공짜로 얻어먹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여러 동맹을 비판했다”고 폭로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과 요구는 더욱 노골화했다. 4월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대미 TV 수출로 연 40억달러를 잃고 있으며 미국이 미군기지 비용으로 연 50억달러를 지출한다며 한국이 더 많은 방위비 분담금을 낼 것을 압박했다. 같은 해 7월 볼턴 전 보좌관이 방위비 분담금 협상차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80억달러(일본)와 50억달러(한국)를 각각 얻어내는 방식은 모든 미군을 철수한다고 위협하는 것”이라고 지시했다.

다음달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서 진행 중이던 연합훈련을 가리켜 “그 워게임은 큰 실수”라며 “우리가 50억 달러 합의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거기에서 나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훈련을 놓고 “이틀 안에 끝내라. 하루도 연장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볼턴 회고록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트럼프 행정부 외교안보 라인 인사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볼턴 폭로’가 신경이 쓰였던지 트럼프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은 25일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찾아 헌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찾은 건 2017년 취임 후 처음이었다. 외신들은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 발간으로 촉발된 ‘한·미동맹 홀대설’을 불식시키려는 목적도 있다”고 해석했다.

◆불가피한 현실 대비 주문 잇따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일 주둔 미군 일부를 폴란드로 재배치하겠다고 밝히면서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다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 아파치헬기가 계류돼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문재인정부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 석좌교수는 지난 8일 페이스북에 “미국의 재정이 구조적으로 좋지 않다”며 “트럼프가 재선이 되든 민주당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주한미군 감축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그는 “이번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바로 미국의 행동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망가진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위력이 없고 미국이 자신의 돈으로 전세계에 미군을 주둔시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도 지난달 28일 미국 퀸시연구소가 진행한 화상세미나에서 주한미군 감축 상황이 오면 이를 비핵화 협상의 카드로 쓸 수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모두 주한미군 감축론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식한 것이다.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종전선언 결의안 채택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30일 “종전선언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둔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론에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한미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소식통은 “지금 한·미동맹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면서 “방위비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 못 하고 트럼프가 감축을 결심한다면 주한미군은 스스럼없이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동북아의 축은 일본 오키나와가 될 수 있다. 미군은 북한에만 대응하는 구조가 아니다. 지역안보 틀을 염두에 둔다”고 덧붙였다.

주한미군 감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현재로선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 힘들어 보이지만 재선된다 하더라도 주한미군 감축을 강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독일과 다르게 북한의 직접적인 군사위협이 상존하고 북한 핵능력 고도화에 따른 미국의 우려가 큰 만큼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한 미군 병력을 한반도에서 빼는 결정은 어렵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한편 미군의 한국 주둔은 1945년 9월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 육군 제24군단이 한국에 진주하면서 시작됐다.

6·25전쟁 참전과 전후 철수,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제7사단의 철수,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정, 그리고 1989년 ‘넌·워너 수정안’에 따른 3단계 감축안, 부시 행정부의 해외주둔 재배치 정책 변경과 2004년 타결된 주한미군 재배치 감축 등으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규모는 수차례 부침을 거듭했다.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