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전투기(KF-X) 공동개발국인 인도네시아의 이탈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경제난을 이유로 KF-X 분담금 5000여억 원을 미납한 인도네시아는 프랑스와 라팔 전투기 구매를 놓고 협상을 벌이는 상황이다.
프랑스 정부도 인도네시아가 라팔 구매를 위해 협상을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늦어도 내년 초에는 라팔 계약을 포함한 양국간 포괄적 방산협력협정이 윤곽을 드러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라팔보다 더 늦은 시점에 개발에 들어간 KF-X가 라팔에 밀려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스텔스 성능도, 항공무장 탑재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개발을 진행한 결과다.
◆프랑스 “인도네시아 라팔 판매 협상중”
로이터통신을 비롯한 외신에 따르면,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은 4일 현지 TV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가 프랑스 닷소 전투기 구매 협상을 벌이고 있다”며 “아직 서명은 하지 않았으나 많은 작업을 수행했고, 거래도 잘 진행됐다”고 말했다.
협상에 포함된 라팔 판매 규모는 36대로 알려졌으나, 일각에서는 48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라팔 제작사인 닷소는 수년전부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라팔 판촉 활동을 지속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경제전문 매체 라 트리뷴은 인도네시아가 양국간 방산협력협정의 일부로 라팔 구매를 신속히 마무리하려 한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는 올해 안에 합의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으나, 프랑스측은 계약 세부 내용 검토 등을 이유로 약간의 시간을 더 갖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파를리 장관은 지난달 26일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과 통화를 했다. 두 장관은 지난 1월과 10월에 회담을 갖고 양국간 방산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수비안토 장관은 미국,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해 전투기 구매 등을 타진한 바 있다.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 이번 거래는 상당히 중요하다. 연간 22대의 라팔을 생산하고 있는 닷소는 추가 물량 확보가 절실하다. 장비나 부품을 납품하는 500여개 협력업체들을 라팔 생산체계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판매 전망이 밝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다.
이집트, 카타르, 인도에서 80대를 주문받았고, 그리스가 18대를 도입할 예정이지만 물량이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추가 주문이 없다면 프랑스 정부는 자국 공군용 마지막 주문량인 30대 발주를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로부터 36~48대 주문이 들어오면 프랑스 공군 물량 주문을 미룰 수 있다. 생산 속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2027년까지 작업량이 확보된다. 항공우주산업 진흥과 일자리 유지 효과도 그만큼 크다.
프랑스는 2010~2019년 인도네시아에 에어버스 헬리콥터 H225M 수색 구조헬기 8대를 포함한16억2000만 달러(1조7600억 원) 상당의 군수품을 판매했다. 프랑스 방산업계 입장에서는 ‘떠오르는 신흥 VIP’다.
프랑스 금융권이 라팔 인도네시아 판매와 관련해 인도네시아측에 재정 지원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현지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도네시아로서는 성능이 검증된 전투기를 신속히 도입하는 효과가 있다. 라팔은 2000년대 실전배치 이후 이슬람국가(IS) 격퇴전과 리비아 공습 등에 참가했다.
인도네시아령인 남중국해 나투나 제도에 중국 어선들이 출몰할 정도로 중국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고, 호주가 F-35A 스텔스 전투기 72대 도입을 추진하는 등 주변국의 군비증강도 빨라지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F-16과 SU-30 정도만 운용하는 상태다. 라팔 도입은 주변국 위협에 대해 상당한 억제력을 제공한다. 특히 미티어 공대공미사일(사거리 100㎞ 이상)과 스칼프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사거리 550㎞)을 탑재한다면 전략적 억제력도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틈새시장 파고드는 경쟁자들…KF-X 어떡하나
이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F-35가 세계 전투기 시장 소요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따른 결과다.
F-35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서방국가들은 F-16 수준의 신뢰성을 가지면서도 성능은 더 우수하고 비용도 저렴할 것으로 기대했다. F-16 대체 수요가 많았던 점도 이같은 기대를 부추겼다.
하지만 F-35의 무장능력은 F-16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 등으로 공대지 능력 강화 소요가 늘어났지만, F-35는 이 부분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다.
도입비와 운영유지비는 높은데 무장능력은 F-16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 불만스러운 국가가 있게 마련이다. 첨단 스텔스 성능과 전자장비가 탑재되면서 기술 보호나 국제정치적인 이유로 F-35 도입이 어려워진 국가도 있다. 틈새시장이 열린 셈이다.
F-16V와 라팔은 이같은 틈새시장을 잘 파고들고 있다. 전 세계에 4000여 대가 판매된 F-16을 개량한 F-16V는 다기능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최신 임무컴퓨터 등을 탑재했으며, 기체 수명도 기존보다 50% 늘어났으며 무장탑재량도 많아졌다.
대만과 슬로바키아 등이 F-16V를 도입하기로 했고, 인도네시아도 24대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한국도 이와 유사한 수준의 KF-16 성능개량 작업을 진행중이다.
라팔은 F-16보다 고성능을 원하나 F-35 도입은 어려운 국가를 중심으로 주목을 받는 모양새다. 라팔 도입국인 인도, 카타르, 이집트는 기존보다 강한 전략적 억제력을 지닌 기체를 원했다.
라팔은 스칼프, 미티어 미사일을 통해 장거리 타격력을 확보했다. 1980년대 개발 당시부터 동체와 날개 대부분을 복합재료로 만들고 레이더 흡수 재료를 사용해 스텔스 기능을 갖췄다. 프랑스 항공산업 기술의 집약체라는 점에서 기술이전도 미국보다 쉽다.
F-16V와 라팔은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에서 함께 거론된 기체다. 반면 KF-X는 분담금 미납 문제조차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2010년대 중반 개발에 착수한 기체가 1970~1980년대 개발된 전투기에 밀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빈약한 무장 때문이다.
KF-X에 탑재되는 항공무장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티어 공대공미사일 뿐이다. 재래식 항공폭탄과 합동정밀직격탄(JDAM), 한국형 정밀유도폭탄(KGGB)이 추가되는데, KF-16보다 못한 수준이다. 다기능위상배열(AESA) 레이더를 포함한 전자장비는 개발중인 상태다.
전투기를 구매할 때는 탑재 무장과 전자장비를 함께 검토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 라팔과 타이푼, SU-30, KF-16을 검토해본 인도네시아가 KF-X 무장과 전자장비 패키지를 살펴보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프랑스는 인도네시아가 만족할만한 기술이전과 산업협력을 제안할 능력을 갖췄다.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팜유를 포함한 현물 거래도 기꺼이 응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지금이라도 KF-X의 무장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술이전이나 금융지원도 어렵다면, KF-X 성능 강화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이탈을 막고 세계 전투기 시장에서 지분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KF-X는 공대공 능력은 미티어 미사일을 통해 확보했지만, 장거리 공대지 능력은 2028년 개발된 국산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을 쓴다. 하지만 개발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위험도 있고, 성능검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공군이 현재 쓰고 있는 타우러스 미사일(사거리 500㎞)이나 개량형인 타우러스 K-2(사거리 600~700㎞)를 장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면, 전략적 억제력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KF-X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내년 상반기 KF-X 시제 1호기를 출고, 성능점검을 거쳐 2020년대 중반에 KF-X 개발을 완료할 예정이다. “기술 불모지에서 이 정도 기체를 만든 것도 대단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시장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전투기는 혈세 낭비로 이어질 뿐이다. 인도네시아의 이탈로 KF-X 앞날에 적신호가 켜진다면, 그 피해는 공군과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