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공식 교류는 1784년 2월 미국의 첫 중국 상선 ‘중국 황후(the Empress of China)’로부터 시작됐다. 이전의 교류는 미국의 독립(1776) 이전이었기에 영국에 복속되거나 기타 열강의 하청 격에서 이뤄졌다. 미국의 중국 진출은 공교롭게 영국선원 존 레디야드(James Ladyard)의 촉구에서 비롯됐다.
그는 그의 선장 제임스 쿡이 하와이에서 사망한 후 미국에 당도했다. 1783년 5월 미국 최대 상인이며 독립선언문의 서명자였던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에게 그는 그가 미국이 보지 못한 상업제국을 운영할 것이라며 중국 시장의 가치를 전했다.
반년 이상을 고민한 모리스는 ‘중국 황후’에 투자했다. 투자는 30%의 고수익(당시 3만달러로 오늘날 약 100만달러 가치)을 올리며 대박났다. 그의 두 번째 투자 상선 ‘팔라스(the Pallas)’는 5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후 15년 동안 중국과 교역하는 미국의 상선 수는 영국의 400척 이상 다음으로 많은 200척 이상을 기록했다. 미국은 단 기간 내에 중국의 2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중국몽’은 세 가지였다. 중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영국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중국 시장을 장악해 아시아를 석권하는 것이었다. 중국을 더 개방하고,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정착을 통해 더 안정적이고 부강한 나라가 되게끔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중국몽’은 링컨 대통령의 국무장관을 역임(1861-1869)한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에 의해서도 피력되었다. 그는 “세계 제패의 장은 아시아”로 봤다. 즉, 미국의 미래가 태평양이고 이는 중국 시장의 정복을 의미했다. 그의 신념은 중국 접근의 수월성을 위한 대륙횡단철도 사업 지원 법안의 통과, 알래스카의 매입과 1858년의 미중조약의 부속조약의 개정(양국민의 인권 개선)으로 체현됐다.
이런 미국의 ‘중국몽’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중국의 개방 확대, 민주주의 정착과 인권보호 목표는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중국전략보고서가 개방되고 안정적이고 강한 중국을 환영하는 입장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