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체조 월드컵 시상식 도중에 한 선수의 행동이 논란을 일으켰다. 기계체조 월드컵 남자 평행봉 시상식에서 러시아 국가대표인 이반 쿨랴크가 유니폼 가슴에 흰색 테이프로 ‘Z’ 표시를 만들어 붙이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 표시는 2월 말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탱크와 군용트럭 등 많은 군용장비에 부착돼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상징처럼 떠오른 것이다. 체조선수가 붙이고 나온 것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분명한 정치적 의사표현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제 운동경기에서는 정치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쿨랴크(동메달)의 행동이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이번 전쟁이 명백한 침략 전쟁인데다가, 러시아가 침략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일리야 코우툰(금메달)이 함께 시상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침략국의 선수가 피해국의 선수를 조롱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넘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가해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일주일 뒤 국제체조연맹은 다른 많은 단체들의 결정에 발맞춰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와 이를 돕고 있는 벨라루스 선수들의 국제 경기 출전을 금지했다.
그런데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Z는 어쩌다가 러시아 침공의 상징이 됐을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우연히 선택됐다’는 것이다. 특수부대와 같은 소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군사 작전과 달리, 수만명의 병력과 수백, 수천대의 군장비가 국경을 넘는 전면전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식별이 특히 중요하다. 때로는 아군의 탱크 중 일부가 훨씬 앞서 나갈 수 있고, 다른 방면에서 접근하는 아군 병력이 있을 때도 있는데, 이때 적군과 혼동해 아군을 공격하는 ‘프렌들리 파이어(friendly fire)’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탱크와 장갑차, 트럭 등에 커다랗고 눈에 잘 띄는 색으로 표시를 한다. 미국이 1991년 걸프전이나 2003년 이라크전 때 탱크에 뒤집어진 V 표시를 한 것도 결국 아군을 식별하기 위한 장치였다. 물론 미군 탱크에 붙은 표시는 아군 내 부대까지 확인할 수 있는 선과 점이 추가된 좀 더 복잡한 기호였지만,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 때 러시아군이 사용한 것은 그냥 흰색 페인트나 테이프로 거칠게 Z를 그린 수준이었다.
미군이나 이스라엘군이 사용하는 V를 제외하면 (I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제외) 직선 2, 3개로 쉽게 그릴 수 있는 알파벳은 많지 않다. L이나 F도 가능하지만 패배(lose)나 실패(fail)로 읽힐 수 있어서 피했을 것이다. 결국 H, K, N, T, Z 정도가 남는데, 이들 중에서는 Z가 강렬해보이고(영화 ‘월드워Z’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많다) 눈에도 잘 띄기 때문에 선택한 것 같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러시아의 알파벳인 키릴 문자에는 Z가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국어가 아닌 영문 알파벳을 가져온 것이고, 그 선택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상징들이 그렇듯 중요한 건 그 기원이 아니라 나중에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덧입혀지는 새로운 의미들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3주째인 지난달 18일, 푸틴은 2014년 크림(크름) 반도의 강제 합병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 응원하는 정치집회로 사용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Z를 사용한 구호들이 푸틴 뒤로 커다랗게 등장했다.
사진 속 배너에는 ‘나치 없는 세상을 위해’, ‘러시아를 위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ZA’라는 표현은 러시아어 키릴 문자의 ‘ЗA’를 로마자로 바꾼 것이다. 러시아인들만 모인 행사에서 러시아어를 표기하지 않고 굳이 로마자를 동원해가면서까지 Z를 사용하는 모습은 푸틴과 러시아가 Z를 이 전쟁의 심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홍보 노력은 제법 효과가 있어서 앞서 말한 운동선수를 비롯해, 군인, 일반 시민까지 이를 사용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최근에는 단순했던 Z표시가 변화, 혹은 진화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단색에서 탈피해 오렌지색을 바탕으로 검은 줄 세 개가 들어가고, 음영이 들어가 입체가 됐을 뿐 아니라, 글자의 마지막은 V자 형태로 잘라낸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즉, 단순한 글자를 넘어 리본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을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우연히 등장한 현상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려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우선 오렌지색 바탕에 검은 세 줄 무늬는 성 게오르기우스 리본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문양과 배색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769년 러시아제국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만든 러시아 최고의 군사 영예인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이다. 역사학자인 러셀 마틴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인들은 이 문양을 전쟁과 군사 작전을 기념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전승기념일 행사다. 매년 열리는 이 행사에 참여하는 정부 관료와 시민들이 가슴에 오렌지 배경에 검은 선이 들어간 리본을 착용하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나치의 침략을 막아내고 무찌른 2차 세계대전과 달리, 근래 들어서는 이를 침략 전쟁을 기념하는 데도 사용한다.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름 반도를 점령했을 때, 이후에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무력으로 개입했을 때도 러시아 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성 게오르기우스 리본을 거대한 깃발로 만들어 흔들었다.
푸틴이 내세우는 논리에 따르면 2차대전 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다. 푸틴의 입장에서 2차대전은 러시아를 위협한 나치와 싸워서 승리한 것인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우크라이나 내부에 있는 네오나치가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네오나치의 나라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대계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네오나치의 세력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9년 선거 때는 2%를 갓 넘는 득표를 하면서 의석을 하나도 배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푸틴이 침공 직전 한 시간 넘는 방송 연설을 통해 러시아가 나치를 무찔러야 한다는 주장을 했을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핑계 삼아 우크라이나 정부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뻔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각적인 상징은 이런 자세한 배경 설명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오렌지색에 검은 줄이 들어간 Z는 러시아의 군사적 힘과 ‘나치를 무찌르자’는 구호를 결합한, 러시아인들을 향한 프로파간다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