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중심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습니다.”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 같은 말로 ‘탈원전’을 선언한 순간,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는 가장 첨예하고 치열한 갈등의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당시 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백지화와 원전 설계수명 연장 불가 방침을 밝혔고, 그렇게 원자력을 들어낸 자리에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이날 고리1호기의 ‘퇴역’을 지켜보던 원자력계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에 ‘뺨을 맞은 듯’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국내 최초 상업 원전으로 40년 가까이 우리나라 전력 수요에 대응하며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원자로의 마지막이었던 만큼 특히 원자력계 원로 중심으로 ‘그간의 노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토로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인순(82)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원전 앞에서 원자력인들을 모아놓고 탈원전을 외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는 겁니다. 원전이 얼마나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를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역대 정부 중 원자력인들을 가장 푸대접한 정부로 기록될 겁니다.”
당시 행사를 준비했던 한국수력원자력의 한 인사도 “자리에 계시던 원자력 1세대 선배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며 “원자력에 몸담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일부는 그런 상황에 이른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취임 40일 만에 이뤄진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을 계기로 정부와 원자력계는 서로 등을 돌렸다. 문재인정부는 에너지 부문 의사결정 구조에서 원자력계 인사들을 차차 배제해나갔고, 원자력계는 속속 내려지는 정부 판단에 “전문성이 결여됐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노태우정부 때부터 에너지 정책을 짜는 민간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는데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하면서 전력수급기본계획, 천연가스수급계획 등 전문가그룹에서 모두 빠졌어요. 원자력을 죽일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해 왔으니깐 낙인이 찍혔던 거 같아요.”
야당은 허탈감에 빠진 이들의 주장을 적극 끌어들였고 에너지 정책은 금세 정파성에 포위됐다. 퇴출 위기에 내몰린 원자력과 그 대안으로 선언된 재생에너지가 여야 갈등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결국 에너지 정책을 꾸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에너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 친원전, 더불어민주당은 반원전’하는 식으로 사실상 정치적 지지가 에너지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었을까. 이 질문에 많은 정부기관·환경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너지 부문 공공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가 괜히 ‘탈원전’이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것”이라며 “당시 원전을 그저 나쁜 것, 정의롭지 못한 전원으로만 치부하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큰 고민 없이 탈원전이란 이름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문재인정부가 탈원전 선언 약 넉 달 뒤 내놓은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는 임기 내내 원전이 계속 늘어나 올해 28기로 정점을 찍은 뒤에야 줄어드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자력의 발전량 비중(한국전력공사 집계)은 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17년 26.8%를 기록한 이후 2019년 25.7%, 2021년 27.4%, 올해 1∼2월 29.1%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장다울 그린피스 정책전문위원은 “문 정부의 탈원전 계획을 따랐더라도 탄소중립 목표 시점인 205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원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2018년 공론화 과정에서 공사 재개로 결론이 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신규 원전 공사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원자력계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를 공약하고 실제 추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제32대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민병주 울산과학기술원 초빙교수는 “당시 탈원전 선언을 뒷받침한 게 결국 안전 문제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설계가 보완된 신고리 5·6호기, 신한울 3·4호기가 기존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걸 백지화한 건 결국 논리적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에너지 문제가 진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재생에너지는 제대로 몸집을 불릴 시간도 없이 정치권에서 몰매를 맞는 처지가 됐다. 2017년 하반기 제20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최연혜 의원이 내놓은 “태양광 패널이 원자력발전소보다 독성 폐기물을 단위 에너지당 300배 이상 발생시킨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미국의 한 환경단체 주장을 인용한 것으로, 국내에 보급된 태양광 모듈 대부분에 해당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여전히 태양광에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됐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국회에서 태양광 중금속 문제가 제기되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문재인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재생에너지 육성 계획을 내놨지만 실제 발전량은 집권 첫해 4.4%(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이 포함된 신재생에너지 기준)이던 데서 4년 만인 지난해 6.8%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지난해 정부가 2030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발표하며 신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30%까지 끌어올린 걸 고려하면 그 성과가 더 미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부터 에너지를 해방하라
제20대 대선에서 정권 탈환에 나선 대선주자들이 이런 상황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최재형 의원은 정치 입문 자체가 애초 감사원장 시절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게 계기가 됐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 출마 선언 6일 만에 공개 일정으로 탈원전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원자력계의 대표 인사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를 만났다. 본선에 올라서는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찾아 원자력 공약을 발표했다.
결국 이런 행보의 자장 안에서 대통령 당선 이후 국정운영 방향까지 짜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인수위에 소속돼 활동 중인 에너지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탈탈원전’의 뜻이 강하게 읽힌다. 인수위가 에너지 전문가로 공개한 인사 중 관료를 제외하면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경제학),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 김지희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포함됐다. 박 교수와 정 교수는 탈원전 정책 비판을 주도해온 교수단체인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 소속이다.
인수위가 지난 12일 탄소중립 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기후·에너지팀장을 맡고 있다고 공개한 김상협 상임기획위원의 경우도 이명박정부 대통령실 녹색성장기획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인수위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상 한정된 전력량을 둘러싼 두 전원 간 ‘제로섬 게임’이 될 확률이 높다. 이미 인수위 경제2분과는 최근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에서 “근본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엄밀히 평가해 그 필요성과 적정성을 점검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더욱이 현시점에서 인수위 내에 재생에너지를 대변할 인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전의 압도적 승리’가 전망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원전을 늘리려고 할 거고 그럼 다른 전원이 비중을 줄여야 하니 신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낮추려 할 겁니다. 인수위가 태양광 보급 등에 대한 점검 의사를 계속 밝히고 있는 만큼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조정도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갈등이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두 전원 간 소모적 갈등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에너지 정책을 이념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 시급해보인다. 노동석 연구위원은 “에너지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순간 망한다”며 “에너지 믹스를 결정하는 우리나라 구조는 정치가 관료를, 관료는 전문가를 지배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에너지 정책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정부 시절 관련 공공기관장을 지낸 인사는 “에너지가 정권에 따라 1∼2년 내로 왔다 갔다 하면 수급 측면에서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 목표에 여야가 합의하고 그 틀 안에서 정책이 운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관련 연구원장을 지낸 다른 대학교수도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원전을 둘러싼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이 문제가 돼 원자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했고, 그 여론을 업고 문재인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한 것이었다”며 “국익을 위해 에너지 관련 각 그룹의 의견을 충실하게 청취하고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