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시절 첫 시국사건 변호를 맡으며 인권변호사로 헌신해온 한승헌 전 감사원장이 20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0년 검사로 임관해 법무부·서울지검 등에서 근무했고, 1965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에는 군사정권 아래 양심수와 시국사범들을 변호하는 데 힘썼다. 고인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1967)’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1980)’ 등을 변론했다.
고인은 군사정권 폭압에 맞서며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72년 여성동아에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떤 조사(弔辭)’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동조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으나, 42년 만에 재심을 청구해 2017년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인은 또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음모 사건에서 공범으로 몰려 투옥됐다.
민주화 이후에는 법조계 원로로서 굵직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6년 고인은 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과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전신이다. 김대중정부 때인 1998∼1999년에는 감사원장을 지냈다. 노무현정부 때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이날 빈소를 찾아 5분간 머무르며 고인을 추모한 문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에서 “한 변호사님과 인연은 제가 변호사가 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며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를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대학 4학년 때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돼 구치소에서 감방을 배정받았던 첫날, 한순간 낯선 세계로 굴러떨어진 캄캄절벽 같았던 순간, 옆 감방에서 교도관을 통해 새 내의 한 벌을 보내주신 분이 한 변호사님이었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이날 빈소를 찾은 뒤 “저를 아주 많이 아껴주셨는데 너무나 애통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고인은 기본권이 극단적으로 억압된 군사정권 시절 인권 수호에 몸 바쳐온 만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가 성숙한 민주사회라는 것. 이어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사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2018년 펴낸 저서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에서는 “사법부에 대한 외풍은 재판권 독립의 장애요소임에 틀림없으나 사법부 내의 내풍은 그와 다른 차원의 위험요소로서 크게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례식장은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5일, 장지는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