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세계포럼] 검찰총장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소탈한 성품, 격의 없는 행보에도
불통과 고집의 이미지 덧씌워져
검찰 때 강했던 자기확신 경계하고
용산시대 연 소통의 초심 새겨야

“대통령님 여길 봐 주세요!”

지난달 24일 용산 어린이정원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깜짝 등장했다. 4박6일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이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을 대통령 부부는 ‘팔도장터’ 행사장 부스를 돌며 격려했다. 시민들이 대통령 부부 모습을 담으려고 휴대전화를 눌렀으나 뒷모습만 찍힐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치자 윤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현장에 있었던 지인이 전한 상황이다. 이튿날 윤 대통령이 국무회의 주재 도중 코피를 흘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청와대를 떠난 이삿짐이 옛 국방부 청사로 옮겨온 게 1년5개월 전이다. 용산 대통령실은 신문사 31층 사무실에서 멀찌감치 내려다보인다. 늘 보는 대통령실 주변 풍경은 단조롭기까지 하다. 10층짜리 건물 앞에 차량이 오가고 가끔 잔디밭에 행사용 흰 천막이 세워져 있다. 외국 정상의 국빈방문을 알리는 예포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박희준 논설위원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용산 시대를 실감한다고 했다. “청와대에선 대통령 얼굴 보기가 그리 힘들었는데, 여기선 시도 때도 없다”고 전했다. 일과 후에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찾는 일도 잦다. 청와대 시절 참모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비서동에서 본관까지 500m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걸으면 10분 정도 걸렸고, 본관에서는 경호 절차를 따로 거쳤다.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을 만나려면 면담 신청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보고는 주로 통화나 서면으로 이뤄지는 일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 참모들과 수시로 격의 없이 소통하는 건 큰 장점이다. 청와대를 떠나 용산에 대통령실을 마련한 취지 그대로다. 윤 대통령의 성품 자체가 소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엊그제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회의는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열렸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야외에서 간이탁자를 놓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모습은 생경감까지 준다.

용산 시대를 연 윤 대통령의 강점이 국민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지난해 11월 출근길 약식 인터뷰 중단 이후 날짜가 더해지는 만큼 국민과 거리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되레 불통과 고집의 이미지만 덧칠해지고 있다고나 할까. 야당과 비판 언론의 지속적인 공세 탓이 크지만 윤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검찰과 이명박정부 출신 위주의 인사, 각종 ‘이권 카르텔’ 타파 메시지, 잇단 이념문제 제기 등이 어우러져 ‘대통령 윤석열’보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도드라지게 했다.

검사는 나쁜 사람을 때려잡는 일이 업이다. 사안을 유죄 아니면 무죄, 선과 악으로 재단하려고 한다. 법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자기 확신이 매우 강하다.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통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검사가 평소 만나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나쁜 놈들’ 아니면 “검사님, 검사님” 하면서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검찰 자체가 상명하복의 문화가 지배하는 조직이다.

윤 대통령도 2021년 3월 검찰총장을 그만둘 때까지 27년간 검찰에 몸담았으니 검사 문화가 배었을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소신과 주관이 강하다. 그래서 성공적인 정치 입문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단박에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런 기질은 외교 방향을 바로잡고 개혁 과제를 밀어붙이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확신이 지나쳐 아집과 불통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대화와 타협, 소통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정치의 문법은 검찰과 다르다.

여당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완패로 내년 4월 총선 경고음이 크다.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선택한 이들조차 등을 돌렸다. 지자체 한 곳의 선거라지만 이대로 가면 ‘여당 필패’라는 인식 확산과 그로 인한 악순환의 고리를 피할 수 없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는데 “차분하고 지혜롭게 내실 있는 변화”로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

물리적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5월 용산 시대를 열던 때의 초심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참모들과 활발해진 소통의 각도를 돌리면 된다. 국민과 각계각층, 그리고 야당으로도. “대통령님 여길 봐 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릴 것이다.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