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황정미칼럼] 대통령의 ‘비정한 정치’

총선 과정에서 누적된 윤·한 갈등
검찰 인사·백서 논란 속 수면 위로
巨野, ‘김 여사 특검’ 정국 벼르는데
보수 분열 놔둔 채 상대할 수 있나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공연한 비밀을 ‘방 안의 코끼리’라 부른다. 중요한 문제임에도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자신에 불똥이 튀는 걸 원치 않거나 말해봐야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기 어려울 때 대부분 입을 다문다. 용산 대통령실 ‘방 안의 코끼리’는 김건희 여사 이슈라 생각했다. 김 여사가 북한을 드나들었다는 한 목사로부터 고급백을 받은 영상이 공개된 뒤 정치권 안팎이 들썩였지만 대통령실은 공식 해명을 하지 않았다. 연초 방송사 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매정하게 끊지 못해 아쉽다”고만 했다.

그러던 윤 대통령이 9일 정부 출범 2년 회견에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을 끼쳐드려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참모들과의 예상 질의답변에서 사과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니 대통령의 작심 발언이었다. 회견 며칠 전 이원석 검찰총장은 전담 수사팀이 증거와 법리에 따라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방 안의 코끼리’는 사라진 줄 알았다. 대통령이 직접 김 여사 처신을 사과했고 검찰총장이 신속·엄정 수사를 예고했으니 수사 결과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서울중앙지검 지휘 라인이 모두 바뀌는 이례적 검찰 인사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황정미 편집인

대통령실은 4·10 총선과 상관없이 예정된 인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 수사 장기화, 김 여사 수사 방식을 놓고 용산·검찰 갈등설이 불거졌던 점을 감안하면 이원석 검찰총장에 대한 비토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이 총장은 검찰 인사 관련 질문에 7초간 침묵해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전임 정부 추미애 법무장관 시절 윤 대통령이 당사자로 겪었던 ‘검찰총장 패싱 논란’을 연상케 했다.

당장 야당에서는 “김 여사 방탄용 인사”라고 몰아붙였다. 공교롭게도 검찰 인사 후 김 여사 공개 행보가 시작된 걸 보면 대통령 사과는 김 여사 이슈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신호탄’이었다는 의구심이 든다. 검찰 수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단할 수 없지만 어떤 결과가 나와도 시끄러울 건 분명하다. “왜 이 시점에 그렇게 하느냐”는 한탄이 여당 내에서도 나온다. 대통령의 ‘큰 그림’까지는 몰라도 그 그림의 큰 조각 중 하나로 대통령과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갈등이 꼽힌다.

대통령실은 한동훈 법무장관 시절부터 김 여사 관련 도이치모터스 사건 수사가 지지부진한 데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정부에서 탈탈 털었던 사안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해 야당의 김 여사 특검법 공세를 방기한 책임이 한 장관, 이 총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후 알려진 대로 총선 기간 국민의힘 사령탑을 맡았던 한동훈은 김 여사 고급백 수수 사건 해명 요구 등으로 몇 차례 용산과 충돌을 빚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전언이다. 이번 검찰 인사를 한동훈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검사들을 내친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여당 내에서는 총선에서 패배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총선 백서에 누구 책임을 더 크게 넣을지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이번 총선 참패는 윤석열정부 심판론이 이재명·조국 심판론을 압도한 결과다. 누가 봐도 맨 앞에 대통령의 국정 운영 실패가 있다. 선거 참패로 치러지는 전당대회에 패장이 나서는 게 맞느냐는 논의는 별개다. 윤·한 갈등은 집권 핵심층을 뒤흔드는 ‘뇌관’이나 다름없다. 이미 이준석 세력의 이탈로 보수 진영은 균열된 상태다.

영수회담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특검 정국을 벼르고 있다. 검찰 인사 파문이 특검 정국을 더욱 달궜다. 강성 민주당 지도부는 조국혁신당 인사들과 걸핏하면 탄핵을 거론한다. 보수 분열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자초했다는 걸 윤 대통령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총선에서 참패한 뒤 대통령은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는데 내부 갈등을 키우면서 바깥 세력을 상대할 수는 없다. 내부 분열을 꾀하는 ‘비정한 정치’는 후환만 남길 뿐이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