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났다’
명품시계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 때 백화점 오픈 시간이 되기 무섭게 시계 매장에 달려가는 ‘오픈런’ 현상도 이젠 옛말이 돼가고 있습니다.
시계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스와치 그룹, 리치몬트 그룹 등 시계 제조사 매출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요. 불과 지난해만해도 명품시계를 사기만 해도 재테크가 된다는 ‘시테크’가 흔하게 통용됐지만, 올해는 정 반대의 상황이 된 듯 합니다. 시계 시장에 기후위기가 닥친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바뀐 이유는 무엇일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픈런’, ‘시테크’는 이제 옛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는 유동성 악화를 막기 위해 돈을 풀었습니다. 그 여파로 글로벌 증시와 가상화폐 시장은 호황을 맞이 했는데요.
금융투자를 잘 해서 여윳돈이 생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습니다. 여윳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달달한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명품이기 때문입니다.
명품 선호현상이 커지면서 명품 산업의 대표주자인 시계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게 평소 50m만 달려도 허파가 뒤집어지는 사람도 백화점 문이 열리면 시계 매장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적을 보여주는 ‘오픈런’ 현상이었습니다.
롤렉스(Rolex)나 까르띠에(Cartier) 같은 시계는 모델 상관없이 구입만 했다가 되팔아도 몇 백만원을 버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였고, 덩달아 다른 유명 브랜드 시계 수요도 커지게 됐습니다.
오픈런 현상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중국의 경우 명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 세계 최대의 명품 수요지가 될 정도였습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적어도 명품시계 매장에선 ‘손님은 왕이다’가 아닌 ‘손님은 노비다’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자기 돈으로 시계를 사는데도 팔아주기만 하면 추간판탈출증이 있는 사람들도 허리를 90도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깐요. 그러다보니 명품 시계 매장에서 일하는 일부 직원들은 반대로 경추 디스크가 터진 듯 목이 뻣뻣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수요와 공급은 결국 이퀼리브리엄(균형)을 찾게 됩니다. 내수소비가 꺾이면서 명품시계를 찾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돈이 있다 해도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시계를 구입하는 자신의 모습에 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 깨달음은 법정 스님이 난초를 보고 알게 된 ‘무소유’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한 백화점 명품시계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도 “최근 손님의 수를 보면 코로나 이전과 다를게 없을 정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라며 “롤렉스 매장은 아직 예약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인기 모델을 ‘하늘의 별따기’처럼 구하기 어렵진 않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서울 시내 백화점들을 돌면서 명품시계 매장을 방문하곤 합니다. 직접 느끼기에도 확실히 매장 내 손님이 적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례해 직원들의 친절함은 커지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격 올린 시계 브랜드들은 ‘어찌하리오’
수요가 넘칠 때는 탄력을 받지만, 불황일 땐 급격히 반작용이 발생하는 게 뭘까요. 바로 가격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명품 시계 브랜드는 자사의 제품 가격을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올렸습니다. 대부분의 시계 가격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50% 이상 올라버렸습니다.
문워치(MoonWatch)로 알려진 오메가 스피드마스터(Omega Speedmaster)가 코로나 전에는 한화 기준 700만원 전후로 구입 가능했지만, 지금은 무려 1160만원으로 올랐습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까르띠에 발롱블루(Ballon bleu) 가격도 36mm 기준 1000만원에 근접했습니다. 기자의 머릿속에는 5년전 기준으로 발롱블루는 600만원대로 알고 있는데요.
시계 브랜드들은 물가 상승률을 반영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가격 정책은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를 넘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도 가르자’ 같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지난해 미국 증시가 연평균 11%가 상승했고, 물가상승률은 4.12% 수준이었습니다. 5년전과 비교해도 미국 증시는 약 두 배 가까이 올랐고, 한국 서울 아파트 가격도 50% 이상 오르긴 했습니다. 아, 코스피는 20%도 오르지 못했네요.
하지만 ‘의식주‘인 아파트, 거대 금융시장인 증시와 ‘사치재’인 시계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계 제조사들이 물가상승률을 반영했다고 하지만 지난 5년간 미국 물가는 20~25% 정도 올랐을 뿐입니다.
게다가 중국의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명품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명품을 사들이는 나라가 미국이 아닌 중국이었을 정도니깐요. 아무리 한국 사람들이 명품이 비싸다고 하소연 한들, 중국 사람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명품 브랜드들은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이를 반영해 대표적인 시계브랜드 그룹인 스와치그룹과 리치몬트는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스와치그룹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브레게(Breguet), 블랑팡(Blancpain), 오메가, 론진(Longines), 해밀턴(Hamilton)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리치몬트는 바쉐론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 IWC, 까르띠에, 파네라이(Officine Panerai)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0년 약 55억9500만 스위스프랑(약 8조9230억 원)이었던 스와치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78억8800만 스위스프랑(12조5804억 원)으로 뛰었습니다. 같은 기간 리치몬트 그룹의 매출은 131억4400만 유로(19조6800억 원)에서 206억1600만 유로(30조8700억 원)으로 급증했습니다.
롤렉스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명품시계의 상징이가 돈을 번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들인다는 롤렉스의 지난해 매출은 101억 스위스 프랑(16조1100억 원)으로 롤렉스 역사상 최고 매출을 달성할 정도였습니다. 단일 시계 브랜드로 명품 그룹의 매출액을 넘기다니 과연 롤렉스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들 시계 제조사의 전망은 어둡습니다. 중국의 내수침체로 중국 사람들의 명품 수요가 눈에 띌 정도로 감소했는데요. 중국 뿐만 아닙니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면 새 명품시계를 구입했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드물 정도는 아니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확실히 줄어든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스와치그룹의 올해 1~6월까지의 매출은 34억4500만 스위스프랑으로 전년 동기대비 14.3% 감소했습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6억8600만 스위스프랑에서 2억4000만 스위스프랑으로 급락했습니다.
리치몬트 그룹의 올해 1분기 매출은 52억7000만 유로로 전년보다 1% 감소했습니다. 스와치그룹보다 상황은 나아보이지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올해 1분기 리치몬트의 최고 판매 지역인 아시아 지역(일본 제외)의 매출은 19% 감소했고, 중국에서의 매출은 27% 급락했습니다.
잔치가 끝났으면 뒷정리가 따라오는 법입니다. 청구서는 덤이고요. 장기적인 글로벌 불황이 예상되면서 시계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커지기란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분석입니다.
시계 업체들은 다양한 한정판 출시, 다른 브랜드와의 콜라보 등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내세우며 매출을 이어간다는 입장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시계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는 겁니다. 백화점에서 1000만원이 넘는 새 제품을 사는 것보다 리스크를 감당하면서도 중고 시계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