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의 저주? '국정원 수사' 檢 잔혹사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5년 2월 9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고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원 전 원장은 이날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월에 법관 인사가 나면 재판부 변동 가능성이 큽니다. 앞으로 2개월 동안 재판을 하지 않고 다음 공판기일을 3월 14일로 정하겠습니다.”

지난 1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청사 404호 법정.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7부 김시철 부장판사가 공판을 2개월 뒤로 미룬다고 발표하자 검사석에 앉아 있던 검사 3명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복현 검사가 일어나 “1주일에 2∼3번 재판을 하더라도 재판부 변경 전에 결론을 내야 한다”며 “납득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소용 없었다. 김 부장판사는 “법원 인사는 우리가 임의로 결정하는 게 아니다”고 못박은 뒤 법정을 떠났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국정원법 위반 유죄·선거법 위반 무죄(1심) → 국정원법·선거법 위반 모두 유죄(항소심) → 국정원법 위반 유죄·선거법 위반 파기환송(상고심) → ? (파기환송심).’ 벌써 4번째 재판인데 결론이 어떻게 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원 전 원장의 유죄를 입증해야 할 검찰 수사팀의 핵심 전력에 해당하는 부장검사는 사표를 냈다. 대체 원 전 원장 수사·재판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원세훈 전 국정원장 기소 후 징계·좌천 잇따라

얼마 전 검찰 중간간부 인사가 단행된 뒤 박형철 대전고검 검사가 법무부에 사의를 밝혔다. 그는 이번 인사에서 부산고검 검사 발령을 받았다. 검사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는 ‘고검 → 고검’ 인사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박 검사는 주변 지인들에게 “(인사를) 설마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이렇게 났다”며 한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검사는 대검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장 등을 지낸 ‘공안통’으로 검찰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중견 검사였다.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잇터넷 댓글을 통해 선거운동에 개입했다는 ‘국정원 댓글’ 의혹 특별수사팀이 대선 이듬해인 2013년 4월 출범했을 때 그는 부팀장으로 합류했다. 팀장은 대검 중수2·1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등을 거친 ‘특수통’ 윤석열 검사였다.

특별수사팀은 국정원을 전격 압수수색한 데 이어 원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 적용을 놓고서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국가 정보기관 책임자가 대선 당시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다면 국기문란 행위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자칫 박근혜 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2012년 대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윤 검사와 박 검사는 소신대로 밀어붙여 원 전 원장을 국정원법 위반 외에 선거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했다.

하지만 곧바로 검찰에 ‘역풍’이 몰아쳤다. 먼저 그해 9월 수사의 총책임자라고 할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이 ‘혼외자’ 파문에 휩싸여 낙마했다. 10월에는 특별수사팀장인 윤 검사가 수사 상황을 검찰 지휘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에서 배제됐다. 수사 과정에서 윤 검사와 충돌을 빚은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눈물을 흘린 뒤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말 그대로 ‘악재’의 연속이었다.

법무부는 윤 검사와 박 검사에게 각각 정직 1개월,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후 둘은 지방 고검을 전전했다. 윤 검사의 경우 대구고검을 거쳐 이번에 다시 대전고검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도 윤 검사는 검찰 조직에 남는 길을 택했지만 박 검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검찰 관계자들 사이에선 국정원의 치부를 파헤친 데 따른 ’원세훈의 저주’란 말까지 흘러나왔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를 둘러싸고 검찰은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2013년 수사를 지휘했던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직무에서 배제했다. 사진은 같은 해 10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 지검장(왼쪽)이 윤 팀장(오른쪽)의 ‘항명’ 발언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 세계일보 자료사진

◆법관 인사 후 ‘원점’에서부터 다시 재판할 수도

검찰 특별수사팀의 원 전 원장 수사는 처음부터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채동욱 당시 총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에 긍정적인 반면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현 국무총리는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이 시작한 뒤에도 줄곧 쟁점은 선거법 위반 여부였다. 국가 정보기관 책임자의 선거 개입은 그 자체로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인 만큼 판사들도 심리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2013년 9월 11일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인정한 반면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1년 여 만에 커다란 ‘반전’이 일어났다. 2015년 2월 9일 항소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은 국정원법·선거법 위반 혐의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며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당시 석방 상태였던 원 전 원장을 법정구속했다. ‘법원이 국가 정보기관 책임자의 선거 개입을 사실로 인정했다?’ 청와대와 여권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다.

사안의 심각성을 느낀 대법원은 이 사건 상고심을 대법관 전부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넘겼다. 그리고 2015년 7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당시 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의 일부 증거 채택에 오류가 있었다”며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내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그렇게 시작한 파기환송심 재판은 초반부터 순탄치 않았다. 공소유지를 맡은 박 검사가 “재판부가 (무죄의) 예단을 갖고 있다”며 퇴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박 검사마저 검찰을 떠난 마당에 남은 파기환송심 재판을 통해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입증하는 일은 그야말로 ‘첩첩산중’, ‘가시밭길’처럼 보인다. 오죽하면 법조계에서 “검찰이 자기네가 기소한 사건인데도 유죄 선고를 원치 않는 듯하다’는 관전평이 흘러나올 지경이다.

법원은 조만간 단행할 법관 인사를 이유로 파기환송심 재판 심리를 미뤘다. 현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 구성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 새로 사건을 맡는 판사들의 공정한 심증 형성을 위해 재판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진행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오는 3월 14일 재판이 재개하면 검찰이 과연 ‘원세훈의 저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