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의 만史설문] 엄동설한속에서도 꽃 피우는 홍매화… 선비의 기상 품다

<94> 납월홍매(臘月紅梅)
매화 같은, 신영복 선생의 고결한 삶이 스러졌다. 한 때 그를 옥죄던 굴레의 허망함을 사색하면 그의 마음을 더 잘 읽을 수 있으리라.
세계일보 자료사진
영롱한 언어로 혼탁한 시대를 맑혀온 지조(志操)의 큰 스승 신영복 선생이 별세했다. 세상이 흠모하여 사숙(私淑)한 그의 사색은 매화를 닮았다. 겨울 눈 속에서 봄의 약동을 불러내는 매화는 선비의 기상을 품는다. 매화의 이름에 관해 명상하던 중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한 송이 매화 스러지는 소리다. 납월홍매 피고 지는 계절이다. 

순천 금둔사의 명품 납월홍매. 음력 섣달에 피는 홍매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납월(臘月) 즉 음력 12월 눈 속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꽃망울을 제일 먼저 터뜨리는 홍매화(紅梅花)가 납월홍매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이미지는 설중매(雪中梅)라는 이름으로 반영된다. 선비의 이미지로 오래 사랑받아온 뜻이다. 따로 암향(暗香)이라고도 부르는 그윽한 향기 또한 선비가 사랑한 매화의 본디다. 사군자(四君子) 매란국죽(梅蘭菊竹) 중 으뜸이라 한다.

납월은 섣달 즉 음력 12월을 이르는 이름이다. 섣달의 이칭(異稱) 즉 다른 이름이 납월인 것이다. 납월 말고도 대대로 써온 섣달의 이칭은 이렇게 많다.

“계동(季冬) 궁기(窮紀) 궁동(窮冬) 궁임(窮稔) 궁호(窮?) 가평(嘉平) 대려(大呂) 도월(?月) 막달 만동(晩冬) 모동(暮冬) 모세(暮歲) 모절(暮節) 빙월(氷月) 사월(?月) 서웃달 세초(歲?) 썩은달 엄월(嚴月) 절계(節季) 제월(除月) 청사(淸祀) 초동(?冬) 축월(丑月) 혹한(酷寒) 극한(極寒) 호한(?寒)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납월’ 항목의 새김”

납(臘)은 사냥의 렵(獵) 즉 수렵(狩獵)과 통하는 말로, 문명의 새벽을 산 사람들이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여 초자연의 존재 즉 신(귀신)에게 드리는 제사의 명칭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제물인 고기(육肉 月)의 뜻이 반영된 글자다. 드물게 보는 단어지만, 납월홍매와 함께 ‘지난해 12월’을 이르는 구랍(舊臘)이란 단어로 우리 말글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매화의 이름 또한 무척 다양하다. 매화를 향한 간절한 사랑과 희구(希求)의 표현들일 터다. 우리의 말과 글은 이런 멋스러움과 다양함을 보듬기 때문에 더 튼실하다.

조선시대의 매화그림 필통. 매화를 친 그림을 얹은 도자기도 많다.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제공
새를 보는 나들이를 탐조(探鳥)라 하는 것처럼 매화를 탐(耽)하여 나서는 것을 탐매(探梅)라고 한다. 추운 겨울 이기고 새 봄 맞는 설렘의 오랜 풍류인 것이다. 유서(由緖)깊은 매화의 상당부분이 분포(分布)한 남도 일대에는 ‘호남 5매’라는 이름이 탐매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담양 계당매(溪堂梅), 전남대 대명매(大明梅), 고흥 수양매(水楊梅) 등이다. 수양매는 분류상의 이름이고 나머지는 지역 또는 심어진 유래나 역사에 의한 이름이다. 선암매와 고불매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수양버들처럼 늘어져 꽃피던 소록도 수양매는 폭우로 쓰러져 고사(枯死)하고 그 자손나무가 자라고 있다.

가사문학관과 식영정(息影亭)이 있는 지실마을의 ‘계당’이란 이름의 한옥에 있는 오래된 매화 세 그루가 계당매다. 송강 정철의 아들 집이었다고 한다. 광주 전남대 대강당 앞의 대명매는 1621년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나무라고 한다. 이들 명매(名梅)들과 함께 주목을 받는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도 천연기념물이다.

지리산 자락 산청도 매화를 탐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단속사 절터의 정당매, 남사마을 원정매, 산천재의 남명매는 산청3매(山淸三梅)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을 했던 고려 말 문신 강회백이 어릴 적 심었다는 630년 수령(樹齡)의 정당매는 경상남도 보호수다. 고려 말 문신인 원정공 하즙 고가(古家)의 원정매, 조선의 학자 남명 조식이 몸소 심었다는 남명매 또한 유명하다. 수명이 다해 보호를 받거나, 밑동에서 난 가지로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는 고매(古梅)들도 이 지역에 많다.

순천의 금둔사는 납월홍매로 한겨울에 주목을 받는 명소다. 낙안읍성과 앵보 한창기의 유물을 모아둔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박물관 부근 금전산 골짜기를 채운 아담한 절이다. 오래 전 성 안의 오래된 토종 납월홍매 고목의 씨앗으로 싹을 내 그 전통을 이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 매병(梅甁). 좁은 아가리, 큰 어깨, 아래로 홀쭉해지는 모양 도자기의 이름이 매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치 사람 대하듯 매화의 생명력에 이런 이름을 붙인 우리의 전통은 매화 사랑의 반영이다. 이른 봄 섬진강 일대는 매화로 거나하다. 아름다운 풍류로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시서화(詩書畵)가 이 풍류를 기려왔다. 이 노래는 그 사랑의 절정이겠다. 시인 이육사의 ‘광야’는 그윽한 향기로 매화의 뜻을 우리 겨레에 심었다. ‘광음’은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이다.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족(蛇足)

‘매화’는 장미과의 중간키 식물인 이 나무의 꽃을 강조한 이름이다. 열매에 중점을 두면 ‘매실나무’다.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인 ‘화괴’(花魁)는 일찍 피어 다른 생명의 봄을 이끄는 의미를 강조한 매화의 이칭이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개화(開花)가 다른 나무보다 빠르다.

일찍 피어 ‘조매’(早梅), 추울 때나 눈 올 때 핀다고 ‘동매’(冬梅) ‘설중매’ 이름도 있다. 꽃의 색깔이 희면 ‘백매’ 붉으면 ‘홍매’다.

매화는 기후현상에 이름을 대주기도 했다. 매실 익어갈 무렵 장맛비가 시작된다고 하여 장마를 매우(梅雨)나 매림(梅霖)이라 불렀다. 중국장마는 메이유, 일본장마는 바이우인데 각각 梅雨의 자기 나라말 발음이다. 장마 이후 열매 익을 시기나 그 열매는 황매(黃梅)라고 했다.

언어에서 보듯, 우리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의 매화에 대한 관심이나 각별한 사랑은 공통적이었다. 이름은 문화적 전통을 담는 그릇으로, 그 자체가 문화다. 말과 글이 그 이름 즉 문화를 담는다. 문자의 존재 의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