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1-17 19:06:40
기사수정 2016-01-17 19:06:39
대학생들 노숙농성 20일/9일 촛불문화제서 제안 계기… 혹한 속에도 40여명 자리지켜/“위안부 합의 관심 불씨 살려야”
지난 15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부근. 이전에 볼 수 없던 직장인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각자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이후 대학생들이 소녀상 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노숙농성을 벌인 지 17일째 되던 날이었다.
소녀상 옆에서 청록색 침낭 2개를 펴던 직장인 김요한(37)씨는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다가 직장인들이 노숙농성을 한다길래 무작정 침낭부터 챙겼다”며 “데이트하는 셈치고 여자친구랑 함께 나왔다”고 웃었다. 옆에 있던 권도란(28·여)씨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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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밤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인근에서 진행된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반대’ 노숙 농성에 참가한 직장인과 학생 등 시민들이 모여앉아 이틀뒤 집회에 쓰일 바람개비를 만들고 있다. 남제현 기자 |
대학생 단체가 지난해 12월30일 시작한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규탄 노숙농성이 보름이 넘으면서 직장인까지 가세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위안부 합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소녀상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행렬은 관심의 불씨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비쳤다.
세계일보 기자가 12시간 동안 진행된 노숙농성을 동행 취재한 이날 집회에는 살을 에는 혹한의 날씨에도 직장인 10여명이 참가해 대학생 35명과 함께 날이 밝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다음날 농성에도 직장인 11명이 참석했다.
직장인의 농성 참여는 지난 9일 촛불문화제에서 권순영(36·여)씨가 공개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권씨는 직장인의 참여를 권유하는 홍보물을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에 올렸고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소녀상 주변으로 모였다. 권씨는 “대학생처럼 직접 행동은 못하지만 주말을 활용해 계속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날 직장인들은 소녀상 오른편 인도를 차지했다. 직장인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바로 ‘미안함’이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승강기 유지보수업체에 근무한다는 진성주(24)씨는 “최근 수요집회에 참가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89세 고령에도 ‘운동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하던 걸 봤는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일본계 회사에 재직 중이라고 밝힌 이모(34·여)씨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이번 직장인 집회 소식을 접하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소녀상을 다녀가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았다. 16일 오전 1시30분쯤 광화문 인근 IT 관련 회사에서 일한다는 임모(42)씨는 회식을 끝낸 뒤 농성장을 찾았다. 임씨는 침낭 속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런 조건 속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며 “나는 비겁해서 이들처럼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나지막히 말했다.
처음 농성에 참가한 직장인들은 도로를 지나는 차량과 대기 중인 경찰 버스 소음에 연신 뒤척였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하나둘 생수병을 찾아 물을 들이켰다. 다른 이들은 장난스레 옆 사람의 생사를 묻기도 했다. 이들이 침낭 옆에 벗어놓은 신발에는 하얀 서리가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오전 7시30분쯤 참가자들은 잠자리를 정리하며 밤샘 농성을 마쳤다. 김요한씨는 “일단 뜨끈한 국밥부터 먹고 집에 갈 생각”이라며 “다음주에 또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승환·조성민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