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와 만납시다] 지난 시간이 기억 안 날까, 추억하지 않으면 잃을까…일기를 써요

초등학생 시절. 제게 방학숙제 걸림돌 중 하나는 일기였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개학을 앞두고, 일상을 ‘조작’하던 기억이 나네요. 착실히 챙겼다면 그런 고생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왜 일기 쓰기 싫어 한구석으로 일기장을 치워뒀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납니다.

그렇다고 버릇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죠. 새해가 밝을 때마다 사놓고 야심 차게 두 페이지를 쓴 뒤, 어디론가 사라진 다이어리만 몇 권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자필로 일기를 써온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달이 아닌 몇 년을요. 그들에게 일기는 무엇인지, 왜 손으로 또박또박 종이를 눌러가며 일기를 써왔는지 세계일보가 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제의 김은빈 씨 사연에 이어 주여현, 한여울 씨의 이야기입니다.




#1. “지나가는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슬플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서울에 사는 올해 스물일곱 살, 주여현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 지나가는 시간이 나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매일 생활을 기록하기 위해 손으로 일기 쓰기를 시작했죠.

2005년부터 일기를 쓰고 있어요. 귀찮다는 이유로 일기 쓰지 않는다면, 그날 하루를 기억의 수단인 일기에서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때로 귀찮더라도 꾹 참았습니다.

 

"2005년부터 일기를 쓰고 있어요. 귀찮다고 일기 쓰지 않는다면, 하루를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일기 쓰기로 ‘치유된다’ ‘돌이켜본다’ 같은 심리적 효과를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는 뿌듯함은 있어요. 굳이 일기가 주는 심리적 효과를 찾는다면,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진다든지? 제 직업이 싱어송라이터여서 그런지 가사의 요소를 찾는 정도인 것 같아요!

자필로 일기 쓴다는 사실에 주변에서는 “우와! 대단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손으로 쓰는 일기는 지웠다가 쓸 수 없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이미 쓴 글자 위에 쓱쓱 선을 긋고 다시 쓴다는 것은 키보드의 백스페이스(←)로 지운 뒤, 써가는 것과 다르니까요. 생각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는 것도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몹시 악필이라, 누구나 읽기 쉬운 텍스트 파일보다 암호 느낌이 나서 비밀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제게 일기는 ‘지난 시간의 나들’이에요. 그때의 저를 만나는 길이라 생각해요.

보통 하루를 마감한 뒤 일기를 쓰는데, 어느날은 새벽 꿈이 생생하다 못해 아파서 깨자마자 기록한 일기가 있어요. 그날의 일기를 보여드릴게요.

 

"개인적으로는 몹시 악필이라, 누구나 읽기 쉬운 텍스트 파일보다 암호 느낌이 나서 비밀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어떤 방법을 통하든 본인 정서에 도움된다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마음 속 평화로운 나날이 얼른 찾아오길 기원할게요(“다른 제보자(김은빈 씨)께서는 심리치료를 이유로 자필일기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는 말에)



#2. “기억에서 없어져 추억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몽땅 잃는 느낌이에요”

안녕하세요! 경기도 안양에 사는 스물한 살 한여울이에요.

저는 중학교 때 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손으로 일기를 쓰게 됐어요. TV에 나오는 배우를 따라 ‘배우노트’를 쓰게 된 것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9년째네요. 초등학교 때 남겨놓은 일기장까지 합치면 10권이 넘어요. 일상, 공연 그리고 수업 등 일기 주제도 다양해요.

 

"TV에 나오는 배우를 따라 ‘배우노트’를 쓰게 된 것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9년째네요."



매일 일기 쓰는 거요? 귀찮은 적 많았죠. 특히 여행갈 때! 일기를 챙겨야 하나 고민도 했고요. 그럴 때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켜요. 귀찮아도 휴대전화는 손에서 놓지 않으니, 메모장에 오늘 하루를 끄적끄적 남기는 거죠.

집에 돌아오면 메모장을 보며 일기를 채워요. 그러다 보면 당시 있었던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 같아요. 매일 일기를 쓰다 보니 하루라도 빠지게 되면 일기장에 구멍이 나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귀찮아도! 꽉 채워온 일기장이 아까워 꼭 하루를 남긴답니다.

일기를 쓰면 어쩐지 남을 의식하게 돼요.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온종일 뒹군 날에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며 그날 채울 거리를 찾게 된다고 할까요? 창피한 일이나 후회할 일이 생겼다면 일기 끝에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적어요. 일단 그렇게 하고 나면 뭔가 정말 행동에 옮겨야 할 것 같고, 자연스럽게 다짐도 하게 돼요.

 

"집에 돌아오면 메모장을 보며 일기를 채워요. 그러다 보면 당시 있었던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 같아요. 매일 일기를 쓰다 보니 하루라도 빠지게 되면 일기장에 구멍이 나는 기분이에요."



작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어요. 올해 새로운 다이어리로 바꾸면서 SNS에 올린 적 있어요. 스스로도 제가 대견해서요(웃음). “나는 매년 마음만 먹는데, 대단해”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 “내가 준 다이어리는 어디 갔냐!”라는 댓글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1년 내내 매일 쓰는 일기라 그런지 다른 사람이 다이어리를 선물해줘도 쓰지 않게 되더라고요. 제게 꼭 맞는 일기장을 고르느라 두세 시간씩 일주일 동안 찾아봤던 것 같아요.

기억에서 없어져 추억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몽땅 잃는 느낌이에요. 일기의 장점이라면 하루하루를 다 기억하며 더 많은 날을 추억할 수 있다는 점? 소소한 일상이라도 기록했으니, 남들이 쉽게 잊는 날이라도 제게는 ‘하루’가 되어 남는 거죠.

제게 일기는 ‘밀린 숙제’? 일기의 의미를 거창하게 말하고 싶어도 결국 별 볼 일 없던 제 얘기다 보니…. 저 대신 하루를 담아주는 기억세포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써온 일기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드릴게요.



내가 처음 산 부루마블을 하루도 버티지 못한 채 엄마에게 찢기고 말았다. 난 엄마가 싫다. 아빠도 싫다. 오빠는 더 싫다. 그냥 하나님만 보고 살란다. 늦잠 안 자고 교회에 꼬박꼬박 다니는 착한 어린이가 될 것이다. 이 일기를 처음 써보니 슬픈 일이 많았다. 지금부터 그 사실을 공개하겠다

난 내가 그러지 않았는데 혼난 적이 많다. ① 학교에서 일어난 일 - 오늘은 정말 (작은 글씨로) ‘재수’ 없는 날이다. 우리 학교에는 스티커를 다 모으면 선물을 주는 것이 있다. 하나만 더 붙이면 난 1등이다. 그러나 결코 이루지 못하였다.

왜냐! 우리 반엔 김재현이라는 아이가 있다. 걔 특징이 시간 나면 지우개, 연필던지기다. 그런데 걔가 지우개를 던졌다. 선생님께 혼날까 봐 가만희(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치지도 않는지 30분 내내 던지고 있었다. 난 결코 화가 나서 걔가 던진 모든 지우개 가루를 돌돌 말아 한 번에 던졌다. 마음속으로 명중! 하는 순간 선생님이 말하셨다. ‘여울아! 넌 지우개 가루 던졌으니까 스티커 하나 떼!’이러는 것이었다. 난 바로 그 자리에 털썩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② 집안에서 일어난 일 - 컴퓨터사건.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 초등학생 시절 쓴 일기예요. 더 웃긴 건 흰 종이에 화이트로 열심히도 썼더라고요. 일기를 쓰면서도 누가 볼까 무서웠나 봐요(웃음).

일기를 꺼내 다시 읽으니 잊고 있던 날들이 다시 머리에 채워진 느낌이에요. 매일을 기억할 수 없는 우리. 전날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주는 기억 선물을 남기는 것. 그게 바로 일기의 매력인 것 같아요.

 

"전날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주는 기억 선물을 남기는 것. 그게 바로 일기의 매력인 것 같아요."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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