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폐허서 다시 시작한 0년

일반인 체험 통해 2차대전 종결 1945년 기록
강대국 전후처리 등 허점과 오류 투성이
저자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
이안 부루마 지음/신보영 옮김/글항아리/2만3000원
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이안 부루마 지음/신보영 옮김/글항아리/2만3000원


1945년 한 해 사건을 기록한 논픽션 다큐멘터리다. 뉴욕 바드 칼리지 교수인 저자 이안 부루마(65)는 부친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전한다. 부친은 2차대전에서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저자는 1945년을 0년, 즉 ‘Year Zero’로 명명했다. 지금의 세계는 1945년 2차대전 종결에서 비롯됐다는 것. 또한 1945년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인류 문명을 새로 재건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였다.

저자는 각종 사료와 사병 및 일반인의 체험기 등을 주로 인용했다. 권력자나 정치가인이 아닌 일반인의 체험을 통해 1945년을 기록했다. 저자에 따르면 2차 대전은 깔끔한 충돌이 아니었다. 승자 중에도 악한이 있고, 패자가 모두 나치인 것은 아니었다. 승전국은 도쿄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으로 정의에 입각한 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정의는 허점과 오류투성이였다. ‘포스트 1945년의 세계사’는 강대국의 정치 편의에 따라 움직였다. 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한국은 승전국의 지위도 누리지 못하고 참혹한 내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폭격맞은 한 도시의 처참한 모습을 교회에서 찍은 사진이다.
글항아리 제공
전쟁 직후 가장 기괴한 장면 중 하나가 난징에서 발생했다. 일본군 오카무라 야스지의 부대는 1938년 화학 무기로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1942년 삼광작전(모두 죽이고, 모두 불사르고, 모두 약탈)으로 200만 명 이상을 죽였다. 일본은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주로 한국에서 납치해 성노예로 부렸다. 위안부는 오카무라 사령관의 아이디어였다. 오카무라는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국민당 허잉친 장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오카무라를 ‘센세이(선생)’로 대우했다. 오카무라는 난징의 외무부 건물을 그대로 점유했다. 3년 뒤 난징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뒤에도 장제스는 오카무라가 더 이상 수모를 겪지 않도록 뒤를 봐줬다. 오카무라는 1966년 자신의 집 침대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도쿄 전범 재판은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였다. 히로히토는 처벌받지 않고 도조 히데키만 처벌받았듯이, 뉘른베르크 이상으로 문제 많은 재판이었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주도했던 일본 전범 중 한 명인 이시이 시로는 1959년 도쿄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이시이의 직속 부하였다가 731부대 지휘관 자리를 승계한 기타노 마사지 중장이었다. 기타노는 혈액 실험 전문가였다. 전후 그는 일본의 첫 상업 혈액은행인 ‘녹십자’의 회장이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역시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기시는 일본군 중위 출신 다카키 마사오(본명 박정희)를 후원했다. 전쟁동안 기시는 만주 괴뢰 국가 건설을 주도한 특급 전범이었다.

저자는 “과거의 실수가 미래에 비슷한 실수를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는 회의적”이라면서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했다. 저자는 과거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무지보다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