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는 타고 난다, 하지만…③천재도 어찌 못하는 '부상'
타고난 천재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 갈 수 없다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커다란 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천재의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부상이다.
△ 외질에 앞서 탄생했던 패싱천재 김병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게임을 책임지고 있는 메수트 외질(28)은 승리를 부르는 패싱천재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아스널 뿐 아니라 독일대표팀에서도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런 외질, 아니 그 보다 더 빼어났던 천재가 한국에도 있었다.
지금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지만 김병수가 그 주인공이다.
1970년생인 김병수 기록은 별반 없다. 뛴 것보다 아파서 쉰 날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쟁끝에 고려대를 김병수 스카우트에 성공했짐나 4년간 단 4경기에만 동원했다.
그것도 3차례는 연세대와의 정기전이다. 고려대측은 다른 경기는 다 져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연고전(고연전)에 그를 투입했다.
그만큼 김병수의 재능은 출중했다.
그를 직접 본 지도자와 기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천재'라는 극찬사를 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단 몇분만에 반하고 말았다. 나중에 알 일이지만 부상으로 기량의 10%밖에 발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스카우트 된 천재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돌았다. 미동 초등학교 천명길 코치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그를 스카우트해왔다.
일단 서울로 오자 '신동 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졌다.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 선생은 이 '신동'을 대선수로 키워보겠다고 아예 포철축구단 숙소로 데려갔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로움을 탄다고 어머니에게 선수단 식단까지 맡기면서 말이다.
어린 꼬마는 포철 연습장에서 포철 선수들과 연습을 했다.
그의 연습상대는 김철수, 박창선, 최순호, 조태천 같은 당시 쟁쟁한 스타 선수들.
어린 아이가 축구를 조금하니까 그저 귀여워만 했던게 아니었다. 훈련 중에 아저씨들 앞에 나가서 개인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때론 연습 경기에 투입(?)되어 아저씨들을 제치고 골을 넣기도했다.
포항제철 관계자와 한홍기 감독은 이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 (현 교육부)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김병수의 이름은 축구계에 파다했다.
지고 있던 경기도 그가 들어가면 뒤집혔다.
김병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쉬지도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경기에 투입되는 바람에 그의 발목은 다시는 예전처럼 되지 못했다.
△ 이회택 대표팀 감독, 한번도 보지 않고 대표선수로 뽑아
김병수는 1989년 6월 A대표선수로 뽑혔다.
90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을 이끌던 이회택 감독은 한번도 보지 못한 김병수를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1989년 6월 주위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대표팀으로 불렀다.
김병수가 1년에 1번 경기에 나올까 말까했기에 이회택 감독이 볼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훈련 때 김병수의 볼 터치를 본 뒤 "월드컵에 같이 가자. 우선 수술부터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수술할 돈도 없었다. 학교측도 수술 뒤 재활기간을 볼 때 그를 수술대로 올려보내기가 뭐했다.
마지막 기회마저 이렇게 날렸다.
이후 이듬해인 1990년 1월과 6월 잇따라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가 심각해 완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수술을 끝내야 했다.
당시 김병수의 발목 인대는 1인치 가까이 늘어나 허물거렸으며 수술도 소용없었다.
쉬다가 뛰다가 하면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한 끝에 김병수는 잊어져 갔다.
김병수는 19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잠깐 모습을 보였다.
독일출신 크라머 감독은 듣도 보지도 못한 김병수를 역시 단한번 본 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며 너무 늦게 만난 인연, 그리고 그놈의 발목을 두고 두고 원망했다.
김병수는 1997년을 끝으로 한많은 축구화를 말없이 벗었다.
박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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