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2-19 10:00:00
기사수정 2016-02-18 20:28:08
'자연이 빚은 풍경화' 단양팔경 사인암
어딘가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장소를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휴대전화만 꺼내 들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담을 수 있는 요즘에는 이 같은 행위가 낙서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수백년 전 우리 선조에게 이는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구나 그곳이 강직함과 지조 등 선비정신과 부합하는 곳이라면 흔적을 남기고픈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단양팔경-. 새삼 말이 필요 없는 관광지 중 하나다. 그중 5경인 사인암(舍人巖)은 단양팔경의 다른 곳과 달리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다른 곳이 풍경 자체로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라면 사인암은 풍경에 선조의 흔적이 덧칠해져 그 무게감을 더한다.
중앙고속도로 단양나들목에서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사인암은 바로 앞까지 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접근성이 좋다 보니 자칫 그 외관만 보고 감탄한 채 지나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기암절벽에 옥빛과 황금빛 등으로 채색한 듯한 독특한 색채, 일부러 쌓아올린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격자무늬, 거기에 암벽 정상 위 우뚝 솟은 소나무들까지. 외관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고 깊은 여운을 남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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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사인암(舍人巖)은 추사 김정희가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더구나 이곳을 찾은 선조들이 우뚝 솟은 사인암에 매료돼 음각으로 이름과 시구 등을 새겨놔 과거 선비들이 남긴 다양한 서체도 볼 수 있다. |
추사 김정희는 이런 사인암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했다. 단원 김홍도는 사인암을 보고 그 모습을 바로 그리지 못하고 1년여가 지난 후에나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걸로 사인암을 봤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멀리서는 그 경치에 반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오목새김 된 다양한 서체에 빠져들게 된다. 사인암에 음각된 선조의 이름만 해도 270여명에 이른다. 사인암이 ‘서체 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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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을 찾은 옛 선비들이 돌에 남긴 이름들. |
옛 선비들이 사인암 벽 여기저기에 새긴 이름과 시구 등을 보며 어떤 글자고 의미인지를 유추해보면 좋겠지만 사실 쉽지는 않다. 한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알아보기 힘든 서체로 쓰인 글자도 있다. 이럴 땐 인터넷 검색으로 쓰인 글귀 등을 미리 알아두고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사인암에 이름을 남겼을까. 기실 올곧고 강직한 선비의 표상을 그대로 빼닮은 사인암의 외관에 매료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더해 사인암이란 명칭이 주는 무게를 빠뜨릴 수 없다.
사인암은 단양 출신 고려 말 학자 우탁(禹倬)이 정4품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즐겨 찾은 곳이어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이 이를 기려 사인암이라 불렀다. 우탁이 지낸 벼슬명에서 따온 이름인 것이다.
우탁은 높은 기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충선왕이 즉위 후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을 범하자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직언하는 지부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내 말이 잘못됐을 땐 이 도끼로 목을 쳐도 좋다”는 의미로 목숨을 내놓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기개가 높았다.
이렇듯 우탁의 생애는 선비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어 후대에 이를 잇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사인암의 곧음과 기개를 기리는 시구들을 벽에 새겨 남겼던 것이다.
卓爾弗群 確乎不拔(탁이불군 확호불발)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바 아니며, 확실하고 단단해서 꿈쩍도 않는다.”(조선 영조 때 단양군수 조정세)
獨立不懼 遯世無憫(독립불구 둔세무민) “홀로 서니 두려운 것이 없고, 세상을 등지니 근심이 없다.”(조선후기 문인 이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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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을 찾은 옛 선비들이 장기를 두기 위해 평평한 돌에 장기판을 새겨놨다. |
사인암 주변을 둘러보면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계곡과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사인암을 끼고 장기 바둑을 즐겼다면 이보다 더한 신선놀음이 어디 있을까 싶다. 다만 아쉬운 것은 누군가 바둑판을 떼가기 위해 바위를 자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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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을 찾은 옛 선비들이 바둑을 두기 위해 평평한 돌에 바둑판을 새겨놨다. |
사인암 옆에는 청련암이란 절이 있는데 이 절을 따라 들어가면 사인암 뒤편으로 갈 수 있다. 뒤편엔 삼성각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그 앞에 우탁이 지은 ‘탄로가(嘆老歌)’를 새긴 비석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늙음을 한탄한 탄로가는 전해 오는 가장 오래된 시조로 알려져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단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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