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2-20 03:00:00
기사수정 2016-02-19 19:58:07
정약용의 고해/신창호 지음/추수밭/1만4000원
조선 후기 대학자, 관료, 과학자, 수사관이었던 다산 정약용. 나이 마흔에 정승에 오른 실력자였지만, 정쟁에 휘말려 20년가량 옥살이를 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유배지에서 돌아오고 나서 4년 뒤 회갑을 맞은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쓴다. 여기서 이르는 자찬묘지명은 자서전 성격의 문집이다.
신창호 고려대 교수가 쓴 ‘정약용의 고해’는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돌아본 책이다. 자찬묘지명은 관에 함께 넣는 간략한 ‘광중본’과 훗날 문집에 싣는 자세한 ‘집중본’으로 나뉘는데, 이 책은 집중본을 번역하고 엮은 책이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힌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그의 생각과 고민이 드러나는 글이다.
다산은 그러고도 15년을 더 살다 갔지만, 그가 주는 울림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것 같다. 정조를 보필해 조선을 개혁하려 했으나 훈구보수파들의 표적이 되어 유배지에서 젊음을 보낸 불운의 삶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자찬묘지명에는 당대 활약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등장한다. 이 책을 통해 18세기 조선 정계와 사회를 조망할 수 있다. 다산의 외증조부는 유명 화가인 공재 윤두서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윤선도가 나온다. 그의 집안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인 이승훈이 있고 이가환, 성호 이익과 연결된다. 채제공과는 사돈지간이며, 혜경궁 홍씨와는 배우자의 집안과 연결된다.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은 그의 조카사위다. 다산 스스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정조의 눈이자 칼로 활동했다.
화성 행차에서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주변 인물들과 얽힌 사건들은 하나같이 18세기 이후의 한국사 방향을 결정지은 굵직한 역사들이었다. 다산은 이를 자찬묘지명에 남겼다. ‘난중일기’ ‘징비록’ ‘한중록’에 못지않은 개인의 역사 증언으로 볼 수 있다. 유배지에서 흘려보낸 삶이 억울하고 헛돈 생은 아니었나 의심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반생 가까이 갇혀 지냈던 자신의 삶에 용서를 구하며 다독인다. 정약용은 정조와의 추억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렇다고 ‘그렇게 임금님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추억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방대한 저술활동으로 소일하며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여유당이라는 호를 지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이다. 겨울에 살얼음 냇가를 건너듯 삼가고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나아감에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적들의 탄핵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다산은 그런 회한을 품고 죽었다. 정적들을 좀 더 품어안았다면 어땠을까 뉘우침도 했을 것이다. 천주학(가톨릭)에 관심을 가졌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신이 존재함을 믿었을 것이다. 다만 절대 왕정의 엄혹한 시절이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승욱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