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초대석]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우리는 사면초가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검찰’ 수장의 말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은 담합 문제에 관한 한 정부부처와의 협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기자는 공정위가 3년7개월간 조사한 은행권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조사와 관련해 금융위원회와 조율됐는지 물었다. 정 위원장은 “법 위반 문제를 부처와 조율하면 엉망진창이 된다”면서 “금융위는 금융기관 편을 들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재는 게 편”이라며 “사전에 각종 정보만 흘러나가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건설 분야 담합 조사 때도 해당 부처 직원을 파견받아 나가면 거의 (범법자를) 잡지 못하고 정보만 다 샌다고 한다. 재벌은 어떨까. 방송·통신업계 초미의 관심사인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 문제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시작도 경쟁, 마지막도 경쟁”이라며 “경쟁을 제한한다면 막고, 촉진하는 거라면 장려한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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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한국공정거래조정원 위원장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경제민주화 문제 등 주요 현안을 설명하고 있다. 인터뷰는 1시간 40분가량 진행됐다. 남정탁 기자 |
정치권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의당에서 내놓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언급하면서 “공정위 위원을 국회에서 추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위원회는 법원과 마찬가지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론내는 곳인데 여야 이해가 갈리면 중구난방이 된다”고 비판했다. 공정위는 정치적 독립이 중요하며 당에서 추천받은 사람이 들어오면 정치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정 위원장이 얘기한 ‘사면초가’가 ‘배수의 진’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정 위원장은 올해 최우선 과제가 경제민주화 작업을 가시화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며 경제민주화 핵심부처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경제민주화가 후퇴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대선 이후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국정과제로 결정한 게 20개 항목이다. 그 가운데 14개가 공정위 소관이다. 공정위 소관 14개 과제 중 9개가 이미 입법 완료됐고, 5개는 국회 계류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민주화가 실종됐다, 후퇴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시각 차이다. 우리가 추진한 것은 국정과제인데, 야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보는 경제민주화는 다르다. 최저임금제, 전세난 같은 것도 경제민주화라고 본다. 이걸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국정과제로 한 것과는 다르다. 공약의 실천 여부를 고려하면 경제민주화가 안 됐다고 말할 수 없다. 공정위 업무는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 보호와 서민생활 안정 등 모두 경제민주화와 관련된다.”
―올해 업무보고를 보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작년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은 어느 정도 했지만, 집행이 돼야 체감한다. 올해에는 대규모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개선과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관행 개선이 핵심 사업이다. ”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 관련 법이 생긴 지 1년이 됐다. 어떤 단계까지 왔나.
“작년에 한진·한화·CJ·현대 4개 대기업집단을 조사했고, 조사가 먼저 끝나는 기업을 대상으로 1분기 발표를 계획하고 있다. 일감몰아주기법이 작년 2월에 개시됐으니, 대기업을 적발·조사해서 처벌하고 시정하는 단계가 가시화할 것이다. 이번 일감몰아주기 대기업집단 발표를 통해 국민이 경제민주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현재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는데, 워낙 복잡하다보니 시간이 걸린다. 이러면 시차가 생긴다. 해당 기업을 동시에 조사했다면 시차가 없겠지만 인력 문제도 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특히 CJ그룹은 최근 조사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룹 총수의 검찰고발 조치도 나올 수 있나.
“총수의 관여, 개입 정도에 따라 다르다. 임원이나 직원이 알아서 한 일로 총수를 고발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입증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총수 일가에 일감을 몰아주는 과정에서 특정 임원이 할 수 있다. 실적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오너한테 잘 보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 정황증거만 가지고 가면 문제가 된다.”
―최근 삼성물산·제일모직 순환출자 개선 결과를 보면 재벌정책 기조가 강경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부는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제한 등을 국정과제로 정해 추진하고 있다. 과거 정부에는 그런 공약이 없다. 이번 정부의 대선 공약이다 보니 일감몰아주기 규제 조항을 만들고, 순환출자 제한 등을 집행한다. (재벌정책 기조가) 갑자기 강화된 게 아니다. 법이 제정되면서 철저하게 집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해 달라.”
―최근 은행 CD금리 담합 관련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금리는 정책적인 판단,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금융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통보했으니, 그걸 받아서 검토하는 과정이 우선이다. 심사관의 심사보고서와 금융기관의 의견서에 대한 검토가 완료됐을 때 심판정을 연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결과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담합 과징금이 수천억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고, 은행권 반응도 민감한데.
“현재는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 방어권 차원에서 (은행에)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 금융권에서 의견서를 언제 제출하느냐가 중요하다. 수천억원 과징금은 금시초문이다. 영국에서 리보(Libor: 런던은행 간 금리) 담합 조사도 몇 년이 걸렸다. (CD담합 문제도) 국내 문제이긴 하지만 국제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국내 금리를 보고 해외에서 투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검토해야 할 사항이 많다.”
―공정위의 법원 패소율이 높아진다는 지적이 있다. 대책은 없나.
“국회나 언론 등에서 공정위 패소율이 높다고 하는데, 패소율이 21%다. 사실 정부 전체 평균(50%)에 비하면 낮은 편이지만 과징금이 걸려 있기 때문에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징금 환급 과정에서 이자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각 단계별로 종합대책을 마련하려고 한다. 조사단계에서 사전에 충분하게 확실한 자료를 찾아오고, 심의절차에서는 쟁점을 걸러서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의결을 해야 한다.”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는 융복합 부분이 있어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기업결합 부분은 굉장히 복잡하고, 특히 이번엔 유사 사례가 없어서 더욱 어렵다. 현재 단계로 예단하기는 어렵고,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관심이 워낙 많아 가급적이면 이해관계와 의견을 수렴하고, 해외 사례도 검토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유도하려고 한다. 정무적인 판단은 할 필요가 없다. 다양한 시각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 시기를 속단할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해 빨리 처리하겠다.”
―비대면 거래와 관련해서 문제가 많다.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나.
“앞으로는 비대면 거래로 갈 수밖에 없다. 아직은 나이 든 세대가 있어서 대면 거래가 많지만, 젊은 사람들 상당수가 휴대전화로 물건을 구입하고 예매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비대면 거래가 워낙 빠르고 국경도 없다보니 공정위 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이대로 두다가는 5년, 10년 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공정위가 얼마 전 발표한 스마트폰 앱 유통이력 제도가 눈길을 끈다.
“예를 들어 세탁기를 사러 갈 경우 생산자가 말하는 정보만 가지고는 신뢰할 수 없다. 과연 이 제품이 리콜이나 불만사항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만든 게 가칭 ‘소비자행복드림’ 제도다. 75개 피해구제 기관과 15개 정보 보유 기관을 연결해 제품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올해 말부터 시범운영을 할 계획이다.”
정리=안용성기자
대담=주춘렬 경제부장
정재찬 위원장은…
●경북 문경(59) ●경북고 ●고려대 경영학과 ●영국 셀포드대학 경제학 석사 ●공정위 경쟁촉진과장 ●〃 경쟁국장 ●〃 기획관리관 ●〃 기업협력단장 ●〃 카르텔조사단장 ●서울지방공정거래사무소장 ●공정위 상임위원 ●공정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