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2-26 02:13:16
기사수정 2016-02-26 02:14:27
미국 유학 초기에 방황
“내 강점 뭔가” 고민 끝
서양 조각적 건축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한
박스형태의 ‘기본’ 추구
저 멀리 산자락에 배죽이 얼굴을 내민 건축물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다. 능선과 하늘에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다며 저만치서 손짓하는데, 이내 다가서면 미술관은 자취를 감추고 돌담이 시야를 채운다. 수원화성의 성벽처럼 크고 작은 돌들이 서로를 퍼즐처럼 에워싸며 따뜻한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 실제로 건축가는 이 미술관을 위해 수원화성과 부석사를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그렇게 돌담 길을 빙 돌고 나면 눈앞에 미술관이 커다란 자태를 드러낸다. 산속에 들어앉은 미술관의 정면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건물 배경은 어느새 산이 아닌,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가득 매우고 있다. 하늘이 갑자기 뻥 뚫리는 기분이다. 건물을 푸른 캔버스라는 무대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 지나는 다리 양 옆 연못에는 하늘이 비치고 그 속으로 미술관이 잠겨든다. 주변 환경과 대지 그리고 하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낸 건축가의 지혜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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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환경에 스며드는 건축을 추구하는 김태수 건축가.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처럼 산허리에 건축물을 짓더라도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살린다. 돈대까지 쌓아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부석사의 건축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
25세에 한국을 떠나 50년간 미국에 머물며 건축가로 일가를 이룬 김태수(80)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를 열기 위해 고국을 찾았다. 미국건축가협회상 등을 수상하며 입지를 굳힌 재미 원로 건축가다. 그의 건축 아이디어의 원천은 ‘어렸을 적 시골에서 본 초가집 마을’이다.
“유학 초기 방황을 했어요. 철학과 문화사를 바탕으로 건축론을 펼치는 서양 아이들 틈에 낄 여지가 없었지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했고, 서양의 조각적 건축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잘할 수 있는 ‘내 것이 뭔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한국의 초가 마을이었다.
“광복 직전 10살 무렵 1년 정도 온 가족이 시골로 내려가 머문 적이 있어요. 경상남도 함안의 칠원이라는 마을인데 아버지 고향인 집성촌 초가 마을이었죠. 초가집 하나하나는 별로인데, 초가집 여럿이 언덕 위에 펼쳐져 있는 파노라믹 뷰(Panoramic View)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어깨를 맞대고 있는 초가 풍경이 교향곡의 울림처럼 그의 가슴에 각인됐다. 산과 어우러진 우리나라 사찰 풍경도 매한가지라 했다.
대학(서울대 건축과)을 갓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철학과 예술을 논하는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기보다는 그들한테 없는 자신의 강점을 찾는 데 노력했다. 그가 설계한 건물물들은 대부분 심플한 박스 형태의 연속이다.
“파노라믹 뷰의 건축에서 자신감을 얻고 나서 저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르코르뷔지에 같은 조각적인 건축가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어요. 대신 예일대 스승인 루이스 칸같이 정형화된 구조를 가지고 그 구조 안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그런 건축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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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경상남도 함안의 초가 마을. 김태수 건축가의 파노라믹 뷰의 모태가 된 풍경이다. |
그는 1970년대에 설계하고 30년 이상 살고 있는 미국의 박스형 자택 사진을 가리키며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필립 존슨의 건축과는 다른 소박하고 심플한 자신만의 건축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거창한 건축철학보다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노정을 중시했다.
“건축가가 되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무엇을 못한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렇지 않고 우왕좌왕하면서 남의 작품을 부러워하고 따라 하기만 하면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박스 형태의 건축을 시작한 것은, 내가 못하는 조각적인 건축을 과감히 버리고 ‘건축의 기본적인 형태에서 시작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출발한 겁니다. 그렇게 심플하고 소박한 재료를 가지고도 좋은 건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죠. 또 그것이 제 성품과도 맞아요.”
좋은 건축이란 최소한의 크기와 기본적인 형태만으로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가 건축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건물이 지어질 땅 위에 서서 그에 알맞은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도 그런 과정에서 모습이 드러났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얼굴을 내민 화강암 바위들과의 조화를 위해 건물 외벽은 국내 화강암을 썼다. 커다란 규모에서 오는 위화감을 없애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서울과천관을 둘러싸고 있는 청계산·관악산이 화강암 산이다. 당시 멋진 건축물에는 으레 대리석을 주로 쓰던 관례를 무시한 파격이었다. 서울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에서 바라보는 과천관은 주변 산과 어우러져 멋진 파노라마를 선사한다.
“처음엔 화강암이 너무 흔한 돌이라 돌담에나 쓰인다며 다를 말렸지요. 하지만 건축물은 그게 놓인 땅과 장소의 일부여야 한다는 소신을 관철시켰습니다.”
그의 건축은 요즘 화두인 랜드스케이프 건축(Landscape Architecture)을 떠올리게 해준다. 우리네 전통에서 뿌리를 찾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건축가가 된 것이다. 건축학도를 위한 장학재단(김태수장학재단)까지 운영하는 그에게서 시대를 이끈 어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어설픈 외형적 전통 추구도 경계했다. 한때 유행했던 시멘트 골조의 기와지붕이 대표적 사례다. 국립민속박물관도 그 예에 속한다.
“한국 건축계의 대부 김수근(1931∼1986)과 사실상 2파전을 벌인 끝에 과천관 설계 공모에 당선됐지만 실무 공무원들이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기와지붕을 올리라고 압력을 행사했어요. 다행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프레젠테이션에서 원안대로 하라고 해 위기를 넘겼지요.”
그는 예일대 대학원 시절 서울시 도시설계 공모에 참여하기도 했다. 원도심을 그대로 보존하고 명지대와 난지도로 이어지는 지역이 인천 영종도까지 확장되는 도시계획안이다. 서해로 나아가는 해양 지향의 수도 서울을 염두해 둔 것이다. 요즘 들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김현옥 시장 시절이에요. 강남에 이미 땅을 사둔 힘있는 이들이 많아 결국 무산됐지요.”
그는 미국에서 미들버리 초등학교, 하트퍼드대학 그레이센터, 미 해군 잠수함 훈련시설, 주튀니지 미대사관 등을 설계했다. 국내에도 교보연수원, LG화학기술연구원, 금호미술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 그의 작품이다. 6월 6일까지 열리는 ‘김태수 건축전’엔 건축 설계도면과 모형 등이 출품됐다. 한 건축가가 콘셉트를 잡고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02)2188-6000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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