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수 없는 형세 만들고도… 방심에 허 찔려 역전 허용

이, 5국서 아쉽게 패배 바둑 격언에 ‘선작가 50집이면 필패’라고 했다. 먼저 50집을 챙기면 반드시 진다는 뜻으로, 유리한 쪽의 방심을 경계하는 격언이다. 이세돌·알파고 5번기의 5국이자 최종국에 딱 들어맞는 경구였다. 이세돌 9단은 큰 집을 선점해 평소라면 절대 질 수 없는 형세를 만들고도 방심의 허를 찔려 역전패했다. 아쉬운 승부였다.

중국 룰에 따라 덤 7집반 부담을 지는 흑을 자청해서 잡은 이 9단은 이날 바둑 내용에서도 기백을 과시했다. 알파고의 약점을 노리는 승리 위주의 작전을 취하는 대신 자기 스타일의 바둑으로 진검승부에 나선 것. 흑1∼5는 고전적인 소목 포진. 알파고는 백6∼12로 응수했다. 수순 중 백10은 바둑계 연구를 촉발할 ‘알파고’류다. 백10도 정석의 일환이지만 백54와 흑11을 교환하고 백24로 가는 수순도 널리 쓰인다. 왜 알파고는 5번기에서 단 한 번도 54의 자리를 택하지 않은 것일까. 알파고는 한사코 10의 자리만을 택했다. 승산이 더 높다고 추정한다는 뜻이다. 알파고의 확률 계산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취재 경쟁 취재진이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의 5국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흑17은 기합의 한 수. 17 자리에 받으라는 백16의 주문을 정면 거부했다. 이후 흑19까지는 필연. 피차 ‘마이 웨이’를 고집한 장면이다. 백20은 때이른 의문수. 흑돌이 많아 백의 운신이 불편한 만큼 굳이 손을 댄다면 23 자리의 가벼운 행마가 나았을 것이다. 흑21∼23으로 살벌한 모양새가 됐다. 백24는 우하귀의 흑 주도권을 인정한 후퇴. 결국 흑25로 백 6·8·10의 석 점이 자연사해서는 백이 좋을 까닭이 없게 됐다.

백26은 큰 곳. 하지만 흑27의 맞보기 자리는 이 9단에게 돌아갔으니 피장파장이다. 백30은 세력 바둑을 원한다는 알파고의 선언. 이 9단은 흑31∼39의 기민한 대응으로 백의 의도를 무력화했다. 백40∼흑47은 흑백의 상반된 입장을 드러낸 호각의 절충이다. 알파고는 중원 경영의 꿈을, 이 9단은 ‘선 실리 후 타개’의 꿈을 키웠다. 이 수순 중 흑43, 백44의 교환은 다소 이례적. 흑에겐 자충수의 의미가 있다. 조훈현 9단은 흑이 이 교환 없이 곧장 45의 자리로 갈 경우 알파고는 백47로 삼단젖힘을 해 좌변 경영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초중반의 하이라이트는 흑의 우하귀 영토 안에서 펼쳐진 백48∼흑59의 백병전이다. 백돌들이 고스란히 포획됐다. 다만 백58로 땅바닥에 내려선 돌이 1선으로 기어 나올 경우 흑17·19·51의 석 점은 2선으로 같이 기어 우상귀의 흑15 쪽으로 향해야 하는 뒷맛이 남았다. 백은 우상귀를 공략할 권리를 갖게 된 셈이다. 흑에 다소 불만족스러운 백60∼68 절충이 이뤄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68까지, 흑의 확정가는 60집이 넘는다. 백이 자랑할 것은 오직 두터움뿐. 이것으로 흑 우세 확정.

상변 삭감에 나선 흑69에 알파고가 백70으로 강압적으로 대응한 것은 불리한 형세를 감안했기 때문. 백70∼흑77은 흑에게 기분 좋은 흐름이나 방심 탓인지 갑자기 의문수가 나왔다. 상변 흑돌의 삶을 서둘러 도모한 흑79·81의 수순이 결과적으로 백의 추격을 허용하는 빌미가 됐다. 흑79로 80 등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고 외쳤으면 흑 우세가 계속됐을 것이다. 결국 우상변 쪽에 백의 큰 모양이 굳어지면서 형세는 알 수 없게 변했다.

좌하귀의 흑107∼백132 절충은 흑에게 불만. 백이 간발의 차로 계속 앞서 나가자 이 9단은 좌하귀에 흑169를 투하해 백180까지 바꿔치기를 감행했다. 하지만 승부는 다시 뒤집히지 않았다. 역시 덤 7집반이 부담이었고, 방심이 문제였다. 알파고의 강력한 수읽기 능력을 과도하게 경계한 것도 보이지 않게 화를 키웠을 것이고….

이승현 논설위원 tral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