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취업·해고·빈곤노인… 어깨 짓누르는 삶의 무게

고선웅 연출 연극 ‘한국인의 초상’ 초등학생 둘이 천진하게 대화한다. “우리 아버지는 리어카 몰아. 너희 아버지는?”/“우리 아버지는 장관이셔.”/“성공했구나.”/“하하하하.”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됐다. 친구 둘이 반갑게 인사한다. “난 서울에 있는 대학 가.”/“난 서울대.”/“성공했구나.”/“하하하하.”

고선웅 연출의 연극 ‘한국인의 초상’의 한 토막이다. 스피드 퀴즈를 풀 듯 배우 두 명이 후다닥 서로 비교한 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비교는 취업, 자녀의 성적으로 줄줄 이어진다. 대화 끝마다 “성공했구나. 하하하하”하고 유쾌한 웃음이 뒤따른다. 더없이 산뜻·발랄하기에, 역설적으로 답답함이 커진다. 비교로 점철된 인생의 종착역에서 기다리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이다.

국립극단이 기획한 연극 ‘한국인의 초상’은 우리 사회를 짜깁기한 한 폭의 몽타주다. 27개의 독립된 조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우리 자화상과 마주한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오늘을 들여다보자며 시작됐다. 연극으로 우리 사회를 말한다니, 말만 들어도 우울하고 무거운 풍경화가 떠오른다.

고선웅 연출의 색채가 밴 연극 ‘한국인의 초상’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풍자와 해학, 과장과 축약으로 그려나가며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국립극단 제공
이런 우려는 접어도 된다. 고선웅은 자칫 진부하고 서툰 비관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탁월하게 요리했다. 그의 장기인 과장과 축소, 해학과 풍자, B급 유머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 결과 연극적 재미와 주제 의식을 모두 잡았다. 일단 우습다. 웃기기에 비애와 연민이 증폭된다. 모두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에 공감하다 보면 희망을 향한 의지를 나누게 된다.

연극은 90분간 청소년 흡연, 낙태, 해고, 성형, 빈곤 노인, 불륜 등 사회 곳곳을 비춘다. 갓난 아들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아버지는 특히 마음을 건드린다. 아버지는 “귀동아, 그 물이 강남으로 간단다. 일단 강남으로만 가면 술술 풀려… 먹는 분유도 외제다? 기저귀도 독일제 프리미엄 펄프란다 아들아”라며 애를 태운다. 계층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아들의 행복을 비는 부성애가 먹먹하게 다가온다. 만원 지하철에 짐짝처럼 구겨 넣어진 시민들은 서로 기대선 채 어디론가 흘러간다. 연차는 언감생심인 비정규직 아빠는 갓난 아기를 들쳐 업고 직장으로 질주한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노인은 번번이 허탕친다. 사흘 째에는 새벽 4시에 나오는 ‘노력’을 해보지만 노인을 기피하는 노동시장에서는 소용 없는 일이다.

고선웅하면 해학을 빼놓을 수 없다. 작은 성기가 콤플렉스인 ‘논현동 상남자’가 치료 받는 장면에서는 큭큭 웃음이 나온다. 우디 앨런의 희극이 떠오른다. 여성을 희롱하는 왜곡된 성(性)문화는 바깥에서 보면 어이 없어서 오히려 우습다.

왜 한국 사회가 이러한가에 대한 답은 없다. 현상을 설명하는 구조적 모순, 이론적 배경을 찾으려는 강박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같은 거대 구조를 드러내기보다 현실을 스케치하고 연민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에 던지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과연 이 모든 소요가 희망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 의문이 들 때쯤 연극은 훌륭하게 매듭을 짓는다.

무대는 마당놀이 판이 연상된다. 객석이 무대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12명의 배우들이 내뿜는 흥과 에너지가 바로 객석으로 뻗어나간다. 이 작품은 배우와 연출이 공동 창작으로 만들었다. 배우들 각자가 겪은 한국 사회를 말하고 기사 자료 등을 모은 뒤 이야기의 편린을 추려냈다. 배우들이 이를 소화해 즉흥연기로 선보이면 고선웅 연출이 구조를 다듬어 나갔다. 음악 선택도 탁월하다. 동요 ‘반달’, 영화 ‘길’의 주제곡,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트레이시 채프먼의 ‘패스트 카’ 등은 상황과 맞아떨어지며 연극의 무게감을 덜어낸다.

공연은 28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계속된다. 3만원. 1644-2003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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