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3-23 20:58:35
기사수정 2016-03-23 20:58:35
얼마 전 A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제목에 비속어가 버젓이 담겨 있어서다. 구글 알파고와 바둑 대결 5국이 끝난 뒤 밤늦게까지 이세돌 9단을 따라붙어 인터뷰한 기사였다. 이 9단은 “아프다”, “아쉽다”, “부끄럽다” 외에도 “쪽**”라는 표현을 썼다. 신문제작 마감에 쫓겨 일어난 실수일 것이다. 하지만 발품 들인 기사의 흠이라서 아쉬웠다. 신문이나 방송은 보도에서 사용할 단어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언론이 언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취재원이 했다고 해서 끔찍한 표현, 속된 말을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다.
“한강둔치에 버들강아지가 피었습니다.”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강둔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둔치 대신에 고수부지(高水敷地)라는 어려운 한자어가 쓰였다. ‘물가의 둔덕진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 둔치를 살려낸 건 언론이다. 둔치가 언중 사이에서 세력을 키우며 고수부지를 밀어냈다. 한자어 노견과 진출입로가 갓길, 나들목으로 바뀌는 데에도 언론 역할이 컸다. 정치인 등 유력인이 내던진 단어가 언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줘 유행어처럼 번지는 일도 흔하다.
단어 선택을 잘하는 정치인으로 단연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꼽힌다. 그는 풍부한 은유와 비유, 고사성어를 써서 정치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몽니’는 그가 살려낸 순우리말 중에 최고 성공작이다.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로 정권을 창출한 김 전 총재는 1998년 12월 국민회의에 내각제 약속 이행을 요구하면서 “몽니를 부릴 것”이라고 말했다.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부리는 성질’을 뜻하는 몽니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계기가 됐다. 어느 록밴드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청맹과니’나 충청도 사투리 ‘틀물레짓’도 그가 언중에게 던진 단어들이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인들의 어휘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일간 USA투데이에 따르면 최근 인정이나 수용을 거부한다는 뜻의 ‘disavow’라는 단어 검색빈도가 급증했다고 한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단체 쿠클럭스클랜(KKK)과 연관성을 부인하면서 이 단어를 쓴 탓이다. 하지만 그는 무슬림 입국금지, 장벽설치, 물고문 발언뿐만 아니라 입에 담기 험악한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미 언론계에서 “우리가 괴물 트럼프를 만들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의 발언을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만 다뤘다는 것이다. 정치권에 막말이 판치는 우리에게도 남의 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