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3-24 21:20:19
기사수정 2016-03-24 21:20:19
‘내숭이야기’ 개인전 여는 화가 김현정
서울 인사동의 한 전시장이 요즘 시끌벅적하다. 입구엔 화환들이 즐비하고, 현수막도 4층 건물 전체를 덮고 있다. 안내인은 물론 보안요원까지 배치된 풍경은 정치행사장을 방불케 한다.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드는 모습도 여느 전시장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거나 작품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모습은 대중 스타의 팬미팅을 연상시킬 정도다.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내달 11일까지 갤러리 이즈에서 ‘내숭이야기’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현정(27) 작가의 전시장 스케치다. 작가는 한복을 입은 신세대 여성의 발칙한 이야기를 한지 위에 수묵담채와 콜라주 기법으로 그려가고 있다. 자신의 자화상이자 동년배 청춘들의 이야기들이다.
“저는 미술이 사회와 호흡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작은 스티커 하나라도 건네주면서 말을 걸고 싶어요.”
그의 이런 노력들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주말엔 관람객이 5000명 정도를 육박할 정도다. 멀리 해외는 물론 제주도에서도 전시장을 찾아주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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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위해 돌진하는 청춘들을 형상화한 작품. 김현정 작가는 내숭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무의식중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념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 |
“전시장 풍경이 별나다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안요원도 안전사고를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보니 예상치 못한 여러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여러 번의 전시를 통해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 지혜라고나 할까요. 많은 화환도 처음엔 고민했지만 보내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차원에서 그대로 놔두기로 했어요.”
전시장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날려버리고 있는 그는 사회적 통념에 따른 몰이해는 그냥 감수하더라도 본질적 요소의 극대화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전시장 참여 프로그램으로 뽑기와 컬러링 코너도 마련했다. 전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자그마한 재미라도 주기위해서다. 관람객과 소통하기 위해 아트토크와 함께 작가가 직접 녹음한 도슨트 가이드 앱도 제공하고 있다. 3D프린터로 평면작품을 입체화시키기도 했다. 한국화와 신기술을 접목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젊고 여물어가야 할 작가가 너무 튄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요. 저는 화가는 1인 창업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입장에서 바라보면 기존의 통념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요. 뭘 해야 하는지가 자명해 집니다.”
그는 시대에 걸맞게 SNS를 통한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SNS를 이용해 ‘소셜드로잉’도 계획하고 있다. 대중과 함께 작품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김현정의 작품 속 여인들은 모두 한복을 입었다. 하지만 행동은 우아하거나 고전미와는 거리가 있다. 말과 오토바이를 타거나 운동을 하고 있다. 당구를 치거나 명품을 바라보며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기도 한다.
“옷과 행동의 대비 속에 겉과 속이 다른 여인의 내숭을 형상화해 본거예요. 통념적 시선에 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내면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현대판 풍속화라고 할 정도로 솔직해지고 싶은 거지요.”
전통의상인 한복과 현대의 일상을 공존시켜 의외의 효과를 얻고 있는 셈이다.
“이런 때는 이런 것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통념에 대한 반기라 할 수 있지요.”
요즘 인사동 거리나 고궁에 젊은 여성들이 한복을 일부러 입고 나다니는 모습이 부쩍 늘었다. 여기에 외국인 관광객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한복의 부활 시대다. 특정한 날에만 한복을 입었던 기성세대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기성세대가 서양의 것을 따라 하기 급급했다면 신세대들은 진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과 수단으로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된 거에요. 여행이나 인터넷 정보를 통해 기존의 통념을 넘어서 좋은 것을 알아본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의 한국화에 대한 접근 방식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당돌하다 못해 발칙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일상 속 모습이라 공감이 된다. 한국화의 유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작품 ‘삼포세대’를 보자. 황금소를 타고 가는 여인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다. 결연하다 못해 슬프기조차 하다.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이다. 슬픔은 정신적 스트레스 해소의 시작점이다. 부조화의 발칙한 발상에 웃고 위안을 얻는다. 그의 내숭 이야기는 한복이 주는 고상함과 비밀스러움에 착안한 것이다. 한복을 입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고 있다. 반투명한 한복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내숭의 커밍아웃이라 할 수 있다. 한복을 반투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직접 얇은 한지를 염색한 후 콜라주를 했다.
“한복이라는 격식을 깨는 파격에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굴레들을 환기해 봤으면 해요. 사회 안에서 조직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음들을 대신 속 시원히 풀어주고 싶어요.”
누구나 자신의 맨얼굴과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법이다. 합리화나 미화하지 않고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숭 속에 감춰진 자신과 마주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틀을 깨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고상하고 비밀스러운 넓은 치마폭에 숨겨진 이야기가 내숭이다. 적당히 힘을 빼고 살아야 한다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통념 시선 역할 기대 등이 우리를 둘러싼 삶의 굴레들이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내 안의 생각들은 늘 치열한 경기를 벌이게 마련이다. 타인의 시선이 모이는 순간 떨리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은 파격이다. 비로소 통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다. 감춰왔던 나의 모습들은 덤벙대고 털털하며, 사실 쌀 한 가마 정도는 거뜬히 드는 익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속박된 나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화상이자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그림을 그릴수록 내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끼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는 전시장에서 늘 한복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 내숭을 주제로 전시를 할 때 한복장인 한 분이 오셨어요. 제작품을 보시곤 복식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을 아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소재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최대한 많이 입어보고 생활 속에서 체득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한복을 알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요즘도 그가 밖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한복을 입는 이유다. 이 같은 ‘실전’이 바로 그림이 되고 있다.
한국화하면 가장 먼저 수묵산수화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들의 일상을 담은 젊은 감각의 한국화를 선보이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제 그림에 대해 그 어떤 말보다 ‘아! 재미 있다, 유쾌하다, 통쾌하다' 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전통 기법과 일상생활을 결합한 그의 작품이 한국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선화예고와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그의 전시는 4월11일까지 계속된다.
편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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