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4-05 20:44:39
기사수정 2016-04-05 20:44:38
포스코미술관 ‘사군자, 다시 피우다’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 뒤에야 남에게 보여줄 만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는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 이 작은 기예도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비로소 붓을 대는 종지를 얻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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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아들에게 그려 보내준, 난초 그리는 법을 표현한 ‘시우란’(示佑蘭). |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시절 아들에게 그려 보내준 난초 그리는 법을 표현한 ‘시우란’(示佑蘭) 속의 글귀이다. 스스로에게 정직함에서 제대로 된 붓질은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살이 떠날 때 8살이던 딸이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보내준 낡은 치마폭에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를 그려 보내주었다. 매화의 토실한 열매처럼 잘 살아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시 한수를 적었다. ‘훨훨 새 한 마리 날아와/우리 뜰 매화나무에서 쉬네//진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 반갑게도 찾아왔네// 이곳에 머물고 둥지 틀어/내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꽃은 이미 활짝 피었으니/토실한 열매가 맺겠네.’ 이미 성장한 딸 아이의 미래를 매화 꽃을 빌려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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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각으로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를 형상화한 조환 작가의 작품. |
포스코미술관이 5월25일까지 여는 ‘사군자, 다시 피우다’전에 출품되는 작품들이다. 전시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작가 32명의 사군자 작품 77점을 선보인다.
이른 봄 흰 눈이 내릴 때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 그윽한 곳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향을 품는 난초, 식물들이 조락하며 찬 서리 내리는 차가운 시절 피는 국화, 곧은 줄기며 푸름을 계속 유지하는 대나무 등 사군자로 지칭되는 식물들을 선비들은 정신적 지표로 삼았다. 이른바 군자의 도다. ‘잘 사는 삶’을 위해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여백의 미를 만끽하고 있는 수운 유덕장(1675~1756)의 묵죽도6곡병(墨竹圖六曲屛)은 현대적 회회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운무와 쌓인 눈을 과감한 여백으로 처리해 추상으로 구상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사군자도뿐 아니라 사군자가 담긴 백자청화 연적 등 도자작품도 볼 수 있다. 이 시대 스승이었던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묵란은 절제미가 압권이다.
이 밖에도 일제강점기 지조와 절개의 의지를 표현했던 석촌 윤용구(1853~1939)의 사군자 10폭 병풍, 항일운동가 일주 김진우(1883~1950)의 묵죽도(墨竹圖), 밝은 달을 배경으로 매화가 피어난 월전 장우성(1912~2005)의 ‘야매’(夜梅) 등이 소개된다.
사군자를 철조각으로 표현한 조환 작가의 작품과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사군자 영상작업도 전통의 재창조라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사군자가 아이디어 빈곤의 미술계에 새로운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