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4-13 20:37:51
기사수정 2016-04-13 20:37:50
흑인 소녀가 굶주림에 앞으로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소녀 뒤편에는 독수리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소녀가 숨을 거두길 기다리듯이. ‘독수리와 소녀’. 사진작가 윤리를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사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가 1993년 기아에 허덕이던 수단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카터는 식량배급소로 가는 길에 굶주림의 참상을 촬영하고 휴식을 취하던 중 흐느끼는 소녀를 발견했다. 마침 독수리가 날아와 앉았다. 카터는 결정적인 순간을 찍기 위해 20여분간이나 독수리의 날갯짓을 기다렸다고 한다. 사진은 1993년 3월26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소녀 운명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소녀를 구하지 않은 채 촬영에 열중했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다. 그는 퓰리처상을 받은 지 석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물론 그가 수단 소녀 때문에 자살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래도 이 사진은 국제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카터의 부작위(不作爲)와 반대로 작위(作爲)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진작가 장국현씨의 금강송 훼손사건이 대표적이다. 장씨는 소나무 지킴이를 자처하면서 경북 울진군에 집을 짓고 사진 촬영에 매진했다. 하지만 예술가적 욕심이 지나쳤다. 그는 대왕송의 웅장한 자태를 렌즈에 담고 싶어했다. 대왕송을 가린 금강송들의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2011~13년 수령 220년 된 금강송 11그루 등을 베어내 버렸다. 산림법 위반으로 법원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 일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장씨의 금강송 사진 전시회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면서다. 예술의전당 측은 뒤늦게 장씨의 전력을 문제 삼아 대관을 거부했다. 하지만 주최 측은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 전시회를 시작했다. 장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 일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의 반대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자연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작가의 전시회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사진작가의 윤리 문제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북미자연사진협회(NANPA)의 윤리 규정을 찾아봤다. NANPA는 “모든 장소와 식물, 동물은 수상이든, 수중이든 관계없이 그 자체로 독특하며 누적된 영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난다”면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해 놓고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는 어떨까. 아쉽게도 홈페이지의 ‘정관/규정’ 등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했다. 윤리 규정 마련은 최소한의 조치가 아닐는지.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