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죽박죽' 성범죄 특별법… 판사도 헷갈리는 죄명

“형법으로 모두 통일해야”

“성범죄만 하더라도 특별법이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죄명이 헷갈릴 때가 많다.” 수도권 한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의 하소연이다. 성범죄를 처벌하는 법규가 형법은 물론 여러 특별법에 흩어져 ‘뒤죽박죽’이 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들조차 이럴 지경이니 일반인이 느끼는 혼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법조계에서는 그동안 끔찍한 성범죄가 발생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 때마다 국회가 ‘성난 민심’을 명분 삼아 무슨 실적처럼 특별법을 양산한 결과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전문가들은 “성범죄 처벌 규정은 단일 법률인 형법으로 모두 통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률 전문가도 헷갈리는 성범죄 처벌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00년대 들어 흉악한 성범죄가 일어나면 매번 처벌 수위가 급격히 올라가고 종전에 없던 새로운 처벌 조항이 생겨났다. 2008년 경기 안산에서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8살 여아를 납치해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과 2010년 부산에서 중학교 입학을 앞둔 13세 소녀를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살해한 ‘김길태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회는 2010년 성범죄 처벌 강화 필요성을 내세워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나란히 제정했다.

특히 조두순 사건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예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국회는 2010년 종전에 있던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대체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13세 미만 아동을 상대로 저지른 성범죄는 한층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국회가 든 명분이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성범죄 피해자의 유형에 따라 적용되는 법률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독특한 체계를 갖게 됐다. 피해자가 19세 이상이면 형법, 13∼18세이면 청소년성보호법, 13세 미만이면 성폭력처벌법으로 각각 처벌하는 식이다. 2009년 광주의 한 장애인학교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이 영화 ‘도가니’를 통해 널리 알려지며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장애인 대상 성범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피해자가 장애인인 경우도 형법 대신 성폭력처벌법으로 다스리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나 성범죄 재판 전담부의 판사들은 사안별로, 또 피해자 유형별로 어떤 법률이 적용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를 들여다보며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회 회의에선 “현행 성범죄 처벌 규정은 일반 국민은 물론 법률 전문가조차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위원들의 지적이 잇따랐다.

◆“형벌의 근본법인 형법으로 통일해야”


한국과 같은 대륙법계 국가들은 성범죄를 원칙적으로 형법에 의해 처벌한다.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이경재 교수는 “독일 형법은 중혼과 근친상간을 제외한 성범죄를 형법 13장 ‘성적 자기결정에 관한 죄’에 규율하고 있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도 성범죄 처벌 조항들을 형법에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성범죄 처벌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형벌의 근본법인 형법으로 통합해 통일성 있게 정비해야 한다”며 여러 특별법에 산재한 성범죄 처벌 조항을 형법에 편입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현행 성범죄 처벌 규정이 피해자 나이에 따라 19세 이상, 13∼18세, 13세 미만의 3단계로 구분하는 게 효과적인지를 놓고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검사 출신인 강민구 변호사는 “이렇게 복잡하게 구별해 형량을 달리하는 것은 입법론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차라리 17세 미만과 그 이상, 또는 19세 미만과 그 이상처럼 2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더욱 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성범죄 처벌 규정이 복잡해진 것이 국회의 특별법 제·개정 남발 탓만은 아니다. 성범죄 예방·처벌을 누가 주도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부처 간 이견도 빼놓을 수 없다. 성범죄처벌법과 청소년성보호법은 둘 다 형법에 대한 특별법이다. 그런데 성범죄처벌법은 법무부, 청소년성보호법은 여성가족부가 각각 소관 부처다. 이 때문에 성범죄자 신상정보와 관련해 등록·관리 업무는 법무부가 맡고 공개·고지 업무는 여가부가 수행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생겨났다.

수원대 류여해 교수는 “성범죄 관련 법률에 대한 재정비의 목소리가 아무리 높아져도 정비되지 않는 것은 분명 각 부처 간의 밥그릇 싸움 때문일 것”이라며 “여기저기 흩어진 성범죄 처벌 규정을 일관성 있게 하나의 법률로 정리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훈·정선형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