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아… 입양인들이 돌아온다] “왜 이제 와서 친가족을 찾느냐고요?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내 친부모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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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가 해보는 거야.’ 1978년 부활절 아침 다섯 살배기 매튜(한국 이름 백형섭)는 손톱깎이를 손에 쥔 채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에는 늘 양어머니가 해주던 손·발톱 손질이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딱’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렇게 깎는 거구나.’ 스스로 대견스러워질 찰나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표정이 일그러진 양아버지의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순간 매튜는 참기 힘든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뜨더니 데굴데굴 굴러 복도 끝에 처박혔다. 숨이 막혀 비명조차 안 나왔다.

“감히 내 손톱깎이를 써?” 양아버지의 무차별 발길질에 매튜는 정신을 잃었다. 이후 10년 가까이 양아버지의 폭행은 일상이 됐다. 중년의 매튜에게 유독 가시지 않는 게 부활절에 당한 상처다.

그는 세 살 때인 1976년 태평양을 건너 미국 오리건주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어느 때보다 따뜻한 손길이 필요로 하는 시기였지만 무서운 나날이 이어졌다. 양아버지는 틈만 나면 때렸다. 양어머니는 말리기보다 “아빠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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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에 시달리던 매튜는 열네 살이 되던 해 집 근처 교회 목사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었다. 목사 부부는 자식으로 품어 줬다. 처음으로 ‘부모의 사랑’을 느꼈다. 지금껏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두 번째 양아버지가 “매튜, 나의 성(라비어)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니”라고 묻던 날일 정도다.

새 부모의 보살핌 속에 그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공학도 출신으로 IT(정보통신) 업계에 몸 담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슴 한켠에 뿌리에 대한 궁금증이 급격히 자라났다. ‘친부모는 내가 어떤 가정에 입양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라고 품었던 생각이 되살아난 것이다. 매튜는 “왜 이제 와서 친가족을 찾느냐고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고 감정적으로도 감당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했다.

그는 40년 만인 지난해 11월 모국을 찾았다. 1973년 4월17일 자신이 강보에 싸인 채 발견됐던 부산에 터를 잡고 친가족과 재회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매튜는 해외입양인 16만7710명 중의 한 명이다. 이 중 67%인 11만2546명이 매튜처럼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에 태평양 등을 건너 외국인 부모 품에 안겼다. 어느덧 한 세대가 흘러 어른이 된 이들이 뿌리를 찾아 한국을 찾고 있다. 그 수는 매년 3000명이 넘는다. 일부는 국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서울 신촌, 이태원의 경우 해외입양인 수백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입양인연대 관계자는 “새 터전에서 성장하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입양인들은 본래의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 본능처럼 태어난 곳을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