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은 지난 1955년 설립한 국군묘지가 뿌리다. 1996년 국립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후, 국립묘지와 혼용했다. 용어사용 문제가 제기되자 검토 끝에 2006년 국립현충원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국군 창설(1948년) 후 여순반란사건과 공비토벌작전에서 전사·순직한 장병을 서울 장충사와 부산 금정사와 범어사에 임시 안치했다. 6·25전쟁 전사자 증가로 묘지 문제가 대두하자 서울근교에서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 자리에 국군묘지가 세워졌다. 국립서울현충원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곳에는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묘역, 국가유공자묘역, 군인·군무원묘역, 경찰관 묘역 그리고 외국인묘역 등 6개 묘역이 있다. 위패봉안관, 무후선열제단, 충혼당 등 3개의 봉안시설도 자리했다. 묘소에 5만4000여위(位), 충혼당에 1만여위 등 총 17만여위 영혼이 현충원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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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7일, 서울 구암고등학교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위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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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풀을 뽑았다던 재람 양은 “묘비도 닦고, 화분도 정리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수줍게 걸레를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
재람 양은 “내년에도 오지 않을까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3학년도 여기 와 있어요”라며 “1, 2, 3학년 전부”라고 말했다.
김민정(17) 양은 봉사동아리에서 활동 중이다. 매년 현충원에 왔다던 민정 양은 “나라를 위해 싸우신 분들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며 “기분이 차분해지고, 역사를 되짚게 됐다”고 현충원 봉사활동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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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양은 “나라를 위해 싸우신 분들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며 “기분이 차분해지고, 역사를 되짚게 됐다”고 현충원 봉사활동 의미를 설명했다. |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으니 재람 양이 입을 열었다.
“어른들도 많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거의 학생이나 유가족분들만 오시잖아요. 일반인 분들도 많이 오셔서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걷고 걸어 10번대 묘역에 접어들었다. 멀리 두 사람이 보였다. 6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입을 굳게 다물고 묘비 주위에 술을 뿌렸다. 돗자리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은 묘를 돌보더니 10여 분 후 일어섰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남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만 왔다고 했을 뿐,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며 쓴 미소를 지었다.
남성은 잠시 발을 멈추더니 “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
부부가 떠난 후, 살펴본 묘비. ‘육군상병 박○○의 묘’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강원도 철원 지역 금화지구에서 전사했다. 전사 날짜로 보니 6·25 전쟁 중 산화한 게 분명했다.
남성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문득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새색시를 두고 6·25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나야 했던 남편.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아들을 키운 엄마. 그리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자라온 아들. 영화를 많이 봤다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이게 현실 아니었을까.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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